나는 엄마와 양푼이에 밥을 비벼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때 '딸랑-'하고 문에 매달린 종이 울리며, 어떤 여자 손님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엄마야! 니 학교 선생 왔는 갑다.“
엄마는 숟가락을 양푼이에 툭 던지고는 벌떡 일어나 문 쪽으로 달려갔다.
"아이고, 우리 아 담임인갑네. 처음 뵙겠십니더!“
그러나 여자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엄마는 뒤에 서 있던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너네 반 샘 아이가?“
나도 고개를 저었다.
"... 혹시 직업소개소에서 오신...?“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엄마 얼굴은 순식간에 죽은 벌레라도 씹은 듯 일그러졌다. 그리고 여자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일단 일하는 걸 좀 보고 판단하겠다고 말했다.
그날부터 엄마는 그 여자를 ‘정양’이라 불렀다.
정양 언니는 일 년 내내 같은 차림이었다. 검은 구두에 검은 스커트, 깃이 빳빳한 검은 셔츠.
긴 머리도 한 올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게 끌어모아 하나로 묶었다. 여름이면 검은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렸고, 겨울이면 소매를 손목까지 내려 단추를 꼭 채웠다.
엄마는 정양 언니가 장례식장 종업원 같다며 못마땅해 했지만, 손님들은 오히려 언니를 좋아했다.
언니를 좋아하는 손님들은 창가에 나란히 앉아 멍하니 커피를 마셨다. 또 어떤 손님들은 끝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커피잔이 비어도 모른 채 몇 번이고 잔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그 옆에서 정양 언니는 가끔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손님들은 정양 언니와 이야기가 잘 통한다고 했다.
정양 언니가 처음으로 가게를 쉬는 날, 우리는 영화를 보러 갔다.
'엄마 없는 하늘 아래'라는 영화였다.
영화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언니는 벌써 눈물을 훔쳤다. '대한 뉴스'를 보다가 우리는 영화관을 나왔다.
영화관을 나오며 들른 1층 서점에서, 언니는 『알퐁스 도데의 작은 사람들』이라는 동화책을 사주었다.
그 뒤로 언니는 가끔 내게 동화책을 사주곤 했다.
소설을 읽을 만큼 훌쩍 커버린 나에게...
주방 아줌마가 쉬는 날, 나는 대신 밥을 하기 위해 주방으로 내려갔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나는 커피통에서 커피 가루를 꺼내 깔때기에 붓고, 소금을 한 꼬집 집어넣었다. 알코올에 불을 붙여 뜨거운 물을 부으며 커피를 뽑았다.
커피 향이 가게를 가득 채울 무렵, '딸랑-'하고 문이 열리더니 정양 언니가 차 배달을 다녀왔다.
"언니야! 얼굴이 허-연 백지장 같다. 어디 안 좋나?“
언니는 맛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밍밍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병원 갔다 왔다."
우리가 말하는 ‘병원’은 곧 낙태를 하러 산부인과에 갔다는 뜻이었다.
"... 그래서 그린기가. 그라믄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자야 되는 거 아이가?"
"... 잠결에 들리는 아기 울음소리가 무서워서 잠을 못 자. 꿈속에서 우는 죽은 아기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매일 밤 사방에서 울어..."
차 보자기를 싸던 정양 언니는 양손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을 주며 입술을 깨물었지만, 손등 위로는 뚝뚝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주방에 걸려있던 흰 수건을 말없이 건넸다.
얼굴을 수건에 묻고 한참을 서 있던 정양 언니는 이윽고 차 배달 보자기를 집어 들고, 등을 꼿꼿이 세운 채 가게를 나섰다.
그날 저녁, 나는 소고기를 듬뿍 넣고 미역국을 끓였다.
그렇게 살아가던 어느 날,
7년 동안 단 한 번도 가게를 쉰 적이 없던 정양 언니가 갑자기 나오지 않았다. 다음날, 한 비구니 스님이 와서 언니가 병원에 있다고 전해주었다.
텅 빈 3인실 병실, 언니는 혼자 눈을 감은 채 앉아 있었다.
"와..., 와 그랬노?!"
"... 그날 아침 봄 햇살이 참 좋았다. 그렇게 눈부시게 화창한 날에 꼭 죽고 싶었다."
한 번도 웃은 적 없던 언니가, 그때 처음으로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연분홍 자두꽃이 흐드러지게 핀 자두나무 아래에서 목을 맨 언니를, 지나가던 비구니 스님이 발견해 119에 신고했다고 했다.
정양 언니는 병원에서 나와 생명의 은인인 비구니 스님을 따라갔다. 그렇게 언니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양녀가 되었고, 성도 '석가'로 바뀌었다.
정양 언니가 아닌 '석가 보현 '스님.
회색 양말에 회색 옷, 회색 모자를 쓴 채, 절에서도 여전히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다.
가게에서 그러했듯, 고개만 가끔 끄덕이며.
그런데도 절을 찾는 보살들은 모두, 보현 스님과는 참 말이 잘 통한다고 했다.
누군가 곁에 앉아 있기만 해도 위로가 될 만큼 외로운 날이면, 나도 가끔 절을 찾는다.
그녀의 회색의 세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