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이는 일행보다 먼저 주막 안으로 들어섰다. 쓰개치마를 깊게 눌러쓴 채 방 한켠에 몸을 뉘었다. 유모의 딸 월이가 몇 차례 밥을 권했지만 끝내 수저를 들지 않았다. 월이가 밥상을 들고 나가던 순간, 덜 닫힌 문틈 사이로 낮고 낯선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아득한 옛날, 중국 땅을 지나 실크로드를 건너, 뜨거운 태양과 모래바람이 이는 나라에 ‘신’이 살았답니다...”
그 목소리는 잔잔하면서도 단정하여, 물결처럼 양이의 귓가로 스며들었다.
“그 ‘신’은 말했지요. 사람은 누구나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고. 양반도, 천민도. 남자도, 여자도. 높은 자도, 낮은 자도.”
순간, 주막 평상에 둘러앉은 사내들의 얼굴에 비웃음이 번졌다.
“허허, 양반이랑 천민이 사랑을 한다고? 참말로 우스운 소리구먼.”
“허튼소리 하고 있네...”
웃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던 사내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는 호였다.
“남녀의 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그 마음을 향한 사랑을 말하는 것이지요.”
"허, 양반네들은 그런 말 하시기 참 쉽지요. 우린 그런 소리 입에 올렸다간 관아에 끌려가 곤장부터 맞습니다요.“
곁에 앉아 있던 또 다른 사내가 거들 듯 비꼬았다.
"그보다 먼저, 양반님들한테 뺨부터 맞겠지요."
사내들은 키득거리며 서로 곁눈질을 주고받았다. 그 웃음은 가벼워 보였으나, 속내에는 체념과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호는 빙그레 웃음을 머금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해보면 어떻겠습니까. 먼저 나 자신을 귀히 여기는 겁니다. 고생한 나에게 뜨끈한 국밥 한 그릇 사 주고, 집에 돌아가서는 처자식에게 따스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귀한 겁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그 집안에서 어찌 귀하고 천한 것이 따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순간, 주막 안은 고요해졌다. 야유를 퍼붓던 사내들조차 술잔을 내려놓고 서로의 얼굴을 살폈다. 몇몇은 어색하게 웃음으며 고개를 끄덕였으나, 한 사내는 여전히 시큰둥하게 코웃음을 쳤다.
“말은 좋지.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쉽게 바뀌겠소?”
그 말에 술상머리가 다시 술렁였다. 긴장과 웃음이 뒤섞이며 흐르던 순간,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주모, 국밥 한 그릇 더 말아주시게! 국물은 뜨끈하게 해서 말이오!”
그 외침을 신호로 삼듯, 사내들 사이에 웃음이 퍼져나갔다. 곧 주막 안은 국밥 냄새와 왁자한 웃음소리로 가득 차, 방금 전의 긴장은 흔적도 없이 흘러갔다.
그러나 그 소란과 달리, 방 안에 앉아 있던 양이의 가슴은 묵직하게 조여왔다. 사내들의 웃음소리가 벽을 넘어 스며들자, 그녀는 손을 들어 단단히 묶어 두었던 쪽진 머리를 풀어내렸다.
머리칼이 어깨 위로 흘러내리자, 곧바로 땋아 댕기로 묶는 손길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마침 문간으로 들어서던 월이와 눈이 마주쳤다. 양이는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마를 돌려라. 집으로 가겠다.”
월이는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
“예...?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애기씨, 지금 함께 가는 시댁 어른들에게는 뭐라고 전하실 건데요? 가마를 그냥 돌릴 수는 없어요!”
잠시 숨을 고른 양이는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몸에 탈이 나서... 도저히 길을 갈 수 없다고 전해라.”
그 말을 끝내자, 그녀는 쓰개치마를 깊숙이 눌러쓰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주막 마당을 가로질러 호의 곁을 스쳐 지나, 곧장 가마에 올랐다.
그 걸음에는 흔들림도, 머뭇거림도 없었다.
안방과 대청 사이에는 짙은 녹색의 대나무 발이 드리워져 있었다. 살림을 맡아 보던 함안댁이 그 발을 살며시 걷어 올리자, 하얀 모시적삼을 입은 마님과 대청에 정좌한 사내, 호가 서로를 마주하게 되었다.
잠시 고요한 침묵이 흐른 뒤, 마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 자네가 이야기를 재미나게 한다는 말을 들었네.“
”저는 전기수가 아닙니다.“
”... 그럼, 무슨 일을 하는 자인가?“
”... 잠시 세상을 떠돌다, 다시 제가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 길 위에서, 제가 듣고 믿게 된 ‘신’의 이야기를 전하며 걷고 있지요.“
마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한참을 머뭇대다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나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네. 그 신은 귀하고 천한 것을 가르지 않는다지. 반상의 구별도 없고, 남녀도 다르지 않으며...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 억울함을 바로잡을 수 있다 하더군.
그게, 정말인가?“
호는 잠시 생각하다가 나직히 대답했다.
”듣기에 따라... 그렇게 받아들이실 수도 있습니다.“
마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한쪽 손으로 치맛자락을 매만지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얼마 전, 내 딸아이가 생과부가 되었네. 대래식 날 아침이었지. 신랑이... 잠든 채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떠나 버렸네.“
그녀의 시선은 잠시 허공에 머물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 딸은 이제 겨우 열다섯... 꽃 같은 아이지. 그런 아이를 홀로 남겨두고 먼저 가다니...“
마님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감정을 누르듯 길게 숨을 내쉬며 다시 눈을 떴다.
”내 딸은... 유복자일세. 나 또한 열여섯에 서방님을 앞세웠지. 그때는 갓난 젖먹이의 울음소리조차... 내겐 들리지 않더군.“
마님은 숨을 고르듯 말을 멈추었다.
”그렇게 사흘을 꼼짝 않고 누워 있다가, 젖 한 번 물리지 못한 아이를 두고... 석가래에 목을 맸다네.“
말끝이 떨렸다.
그녀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숨을 고른 뒤 이내 말을 이었다.
”다시 눈을 떠보니... 시댁엔 열녀문이 서 있었네. 그 뒤로는 혹여 또 딴생각이라도 할까 봐, 시댁 식구들이 전전긍긍했지.
하루 종일 부엌에 세워두고, 마당에 세워두고, 일을 시켰네. 새벽부터 종종거리며 손발을 놀려도, 내 발걸음은 이 집 대문 밖으로 단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었네.
죽어서야 겨우 나갈 수 있다는 저 대문이, 원망스러워 참을 수 없어 도끼로 내려친 적도 있었지만... 결국, 나가지는 못했네.“
마님은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떨구었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들더니, 구김 하나 없이 곧은 모시 적삼의 치맛자락을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어내리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처음 보는 그대에게 이런 부탁을 한다는 것이... 내게도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는지 알아주시게.
... 내 딸을, 이 대문 밖 세상으로 데리고 나가 줄 수는 없겠나?“
대청에 앉은 호의 표정이, 이 집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흔들렸다.
”... 그게... 따님께서 원하시는 일입니까?“
마님은 길게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어딘가에서, 자네가 말하는 그 ‘신’ 이야기를 들었다더군.“
그러자 호는 한층 단호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님이 뜻하시는 바가 무엇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따님의 의사입니다.“
”그러하겠지...“
마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윽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제안은 어떠한가. 자네의 ‘신’도 사람들을 모을 사당이 필요하다지? 자네들 말로는... ‘예배당’이라 하던가.
내 딸에게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재산이 있네. 그 돈이라면... 세상 어디서든 요긴하게 쓰일 정도는 될 걸세.“
세상을 삼킨 듯한 짙은 어둠이 옅어지고, 푸른빛이 서서히 번져오기 시작한 이른 새벽.
굳게 닫혀 있던 대문이 소리없이 열렸다.
그 틈 사이로, 양이가 걸어 나왔다.
그러나 전날 밤, 부엌 아궁이에서 불길에 휩싸여 목숨을 잃은 이는 다름 아닌 양이였다.
그날은 양이의 초상날이었다.
새벽의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부엌 한켠, 시커멓게 탄 시신이 너부러져 있었다. 사람인지 짐승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참혹한 모습이었다.
그 광경을 본 집안 사람들은 혼비백산했다. 초상 치르는 내내, 슬픔보다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데 더 바빴다.
”어린 애기씨가... 한밤중에 부엌엔 왜 들어갔을까?“
”이 집, 열녀로 소문난 집 아니야? 죽은 서방 따라가려던 거겠지...“
”설마... 그런 정이라도 있었을까? 이 집 마님이 어떤 분이셔. 남녀 유별하다 해서, 초행에 온 신랑 얼굴도 못 보게 했다던데...“
그때 창간의 어멈이 나서서 말했다.
”유복자잖아. 귀하게 키우신 애기씨가 얼마나 아까우셨겠어. 그나저나 손끝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던 애기씨가, 왜 하필 부엌에... 그것도 한밤중에...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야...“
그 모든 수군거림에도 마님은 아무 말 없이 침묵으로 일관했다.
졸지에 벌어진 흉사로 집안은 정신없이 초상을 치르게 되었다. 종친들은 시커멓게 타버린 참혹한 시신의 염조차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고, 신랑 측 손님들은 초상이 끝나기도 전에 황급히 자리를 털고 본가로 돌아가 버렸다.
선산에 양이의 관을 매장하고 돌아온 늦은 밤.
양이는 창고방 한구석, 어둠 속에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숨어 있었다. 쪼그린 두 다리와 손이 파르르 떨렸고, 가쁜 숨결이 오르내릴 때마다 가슴은 숨이 막힐 듯 조여왔다.
그때였다.
멀리 대청에서, 위패 앞에 엎드린 어머니의 곡소리가 들려왔다.
깊은 어둠 속에서 혼절하듯 엎드려 울부짖는 그 통곡은 창고방까지 스며들어와, 양이의 가슴을 깊속이 파고들었다.
꾹꾹 눌러 참던 양이의 눈물도 어머니의 울음 앞에서는 끝내 터지고 말았다. 안 된다며 펄쩍 뛰던 어머니를 겨우 설득해 선택한 길이었지만, 양이 역시 두렵고 겁이 났다.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문을 이미 넘어섰다는 사실이, 이 순간 뼈에 사무치듯 가슴에 와 닿았다.
양이는 입술을 꾹 물고 울음조차 삼킨 채, 어머니의 곡소리를 온몸으로 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얼마나 울었을까.
끝내 멈추지 않는 눈물을 눈가에 매단 채, 양이는 문밖 어둠 속에서 곡하는 어머니를 향해 조심스레, 그러나 깊이 고개를 숙여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어머니가 미리 준비해 둔 사내아이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밖은 아직 밤인지, 이른 새벽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빛과 어둠의 경계였다.
양이가 굳게 닫힌 대문을 밀고 나오자, 그 앞에는 호가 담을 바라본 채 말없이 서 있었다.
대문이 닫히는 소리가 새벽 공기에 길게 번졌다.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같은 방향으로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