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형제

by 릿다


양이와 호는 함께 길을 나선 뒤, 종종 낯선 마을에 들러 하루이틀 머물곤 했다. 그럴 때 마침 잔치가 있거나 농번기철이라 품이 귀해지면, 두 사람은 서슴없이 품을 보탰고, 때로는 품삯을 받기도 했다.


오늘은 잠시 예배당에서 인사를 나누었던, 마을 최고 부잣집 김진사 댁 외아들의 혼례 날이다.

새벽부터 마을은 들썩였다. 허들렛일이 서툰 양이가 걱정되어 호는 말렸지만, 양이는 품삯을 벌겠다며 잔칫집으로 향했다.


잔칫집 부엌은 이미 온기가 가득했다.

노릇하게 부쳐진 배추전의 고소한 냄새,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떡시루의 김, 파릇한 나물 고명이 부뚜막 위에 정갈히 놓여 있었다.


한켠 큰 솥에서는 국수가 끓어오르며 흰 김을 뿜어냈고, 부엌 안은 사람들의 손길과 웃음으로 북적였다.

양이가 조심스레 문턱을 넘자. 국수를 삶던 삼순이 어멈이 힐끗 보고 퉁명스레 말했다.

“여긴 일손이 넉넉하니께, 마당 평상에 내논 대추에 잣이나 좀 껴 줘.”


양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부엌을 나섰다.

평상 위에는 잘 말린 대추가 곱게 담겨 있었고, 그 옆 광주리엔 잣이 소복이 놓여 있었다. 양이는 자리를 잡고 앉아 대추를 다듬으며 잣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꿰어 나갔다.


그때였다.

북적이는 대문으로 호가 들어섰다.

마당 한쪽엔 멍석이 깔리고, 여기저기서 잡일을 돕는 손길들이 분주히 오갔다. 그 틈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돌이는 대문을 들어서는 호를 보자, 들고 있던 물건을 그대로 내던지고는 부엌 뒤편으로 허겁지겁 달아났다.


’스승님은 이 집 신랑을 보러 온 걸까?‘


마당에 들어선 호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평상에 앉아 있던 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가볍게 고갯짓을 보내고는 곧장 사랑채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양이는 손에 들고 있던 대추를 내려놓고, 혹시 호의 점심상을 챙길 수 있을까 싶어 부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막 문턱을 넘으려는 순간, 부엌 뒤편에서 낮고 다급한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도련님이랑 나를 형제라고 했다니까! 두 귀구녕으로 똑똑히 들었다니께, 참말이여!”

돌이의 다급한 목소리에 돌이 어멈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래졌다. 그녀는 성큼 다가서며 숨을 죽였다.

“그때... 그 예배당 말이여? 도련님 따라갔던 그날, 그때 그런 소릴 들었다는 겨?”

“야-”


그 순간. 부엌 안에서 전을 부치던 아낙들이 성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니, 돌이 어멈! 전 부치다 말고 어딜 간겨? 전 다 타버리게 생겼잖여!”

돌이 어멈은 헛기침을 하며 허둥지둥 대꾸했다.

“곧 가요. 곧! 금방 가요!”


그리고는 다시 허리를 낮춰 돌이에게 바싹 다가갔다. 목소리는 한층 더 낮고 조급해졌다.

“그래서... 뭐라 했다는겨? 어여 말해 봐-”


돌이는 입술을 꾹 깨문 뒤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퉁명스레 내뱉었다.

“임호라고, 그때 예배당에서 본 저 양반이 말이여, 도련님한테 ’형제님 집‘까지 데려다주고는 예배당으로 다시 오라 하셨다구.

근디 더 환장할 일은, 같이 걷던 도련님이 나한테 이러는 거여.

‘마르코 형제, 우린 이제 한 형제지만 보는 눈이 있으니 집에서는 그냥 돌이라고 부르겠네.’

그렇게 말씀하셨다니까!”


돌이 어멈은 그 자리에 주저앉을 듯 허리를 접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야... 그말, 혹시 그... 뭐냐, 마르코란 사람한테 한 거 아니여? 니가 잘못 들은 거 아녀?”


돌이는 속이 터지는 듯 가슴을 주먹으로 퍽퍽 내리쳤다.

“날 보고 한 말이라니까! 내가 예배당에선 마르코여... 마르코 형제라니까!”

돌이 어멈은 숨을 삼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구야... 암만 생각해도 이거, 니가 대감 마님 씨라는 게 들통 난 것 같다, 이눔아!”


그말을 들은 돌이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땅을 내려다보며 한숨만 연신 푹푹 내쉬었다.

돌이 어멈은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목소리를 더 낮췄다.

“근데... 그 양반은 그걸 어째 안 거여? 마님도 여태 모르는 일을... 대체 어쩌다 알았을까?”


그때였다.

마당 건너편에서 오늘 장가드는 이 집 도령이 호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마침 저기 마르코 형제가 있네요. 오신 김에 얼굴이라도 보고 가시죠?”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돌이 어멈은 기겁을 하며 장독대 쪽으로 달려갔다. 전 부치던 주걱을 움켜쥔 채 된장 항아리 뚜껑을 허둥지둥 열더니, 마치 오래전부터 된장을 푸고 있었던 양 요란하게 손을 놀렸다.

한편 돌이는 급히 뒷담을 넘다 발을 헛디뎌, “으악!”하는 비명과 함께 돌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그 자리에서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해가 지자, 부엌에는 저녁 등잔불이 환하게 켜졌다.

잔칫집 음식을 나눠 먹던 아낙네들은 슬쩍 돌이 어멈 쪽을 바라보며 한마디씩 얹었다.


“일전에 대감 마님께서 그러셨잖여. 그, 호사 뭐시기라고...”

“호사 뭐...?”

“아따, 혀끝에서만 말이 빙빙 도는디 도통 생각이 안 나부러. 암튼, 그 호사 뭐시기라는 게 말이여, 집안에 좋은 일 있을 땐 종살이하는 우리 같은 사람도 몸조심을 해야 한다고 그랬당께.”

‘암만, 암만. 우리도 다 한 식군께. 조심혀야제!“


그 말을 듣던 돌이 어멈은 밥을 먹다 말고 갑자기 숟가락을 내려놓더니, 답답한 듯 주먹으로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부뚜막에 앉아 아낙들과 함께 밥을 먹던 양이의 눈에는, 그 모습이 마치 무언가를 꾹꾹 눌러 삼키는 사람처럼 비쳤다.






이전 01화1화- 만남, 그리고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