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절간의 별빛

by 릿다


사월의 경쾌한 봄바람이 굽이진 산길을 오르는 두 사람보다 앞서 달렸다. 콧잔등에 맺힌 땀방울이 바람에 식자, 양이는 한결 숨이 가벼워졌다. 발걸음에도 다시 힘이 실렸다.


그때, 푸른 나뭇잎 사이를 스치며 튀어나온 청설모에 놀라 양이는 걸음을 멈추었다. 숲속 곳곳에서 들려오는 부스럭거림은 겨울잠에서 막 깨어난 생명들의 속삭임처럼 들려왔다. 낯선 기척에 가슴이 콩닥거렸지만, 햇살을 따라 걷는 이 시간이 양이에게는 그저 즐거웠다.


잠시 후, 산길 옆으로 가느다란 물줄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호는 두 손으로 물을 떠 얼굴을 씻었고, 양이도 손끝을 살며시 담갔다. 봄이라지만 산속 물은 아직 매서워, 손끝이 얼얼할 만큼 차가웠다. 그 서늘함이 오히려 온몸을 맑게 씻어내는 듯했다.


이어진 가파른 오르막에서 숨이 목 끝까지 차오르자, 양이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초록으로 가득한 숲길 너머, 절간으로 향하는 길이 마치 또 하나의 세상으로 이어지는 문처럼 아득히 펼쳐져 있었다.


그 눈 앞에 펼쳐진 마당 가득 자두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꽃잎은 마치 눈처럼 흩날려 내려앉았고, 그 사이에서 빗자루질을 하던 스님이 고개를 들었다.

눈을 크게 뜬 그는 빗자루를 한쪽에 세워두더니, 성큼성큼 달려와 호를 와락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며 껄껄 웃었다.

“살아 있으니 또 보게 되네그려. 어서 들어가세!”


스님은 호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뒤따라오던 양이를 발견하자 걸음을 멈추었다. 호와 양이를 번갈아 바라보던 그는 눈짓으로 ‘누구냐?’ 하고 물었다.


호가 잠시 말을 찾으며 머뭇거리자, 양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스승님을 모시고 있는 양이라고 합니다.”

양이는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러자 스님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지며 환하게 웃었다.
“영리하게 생겼구나!”


호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그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돌려 말을 덧붙였다.

“참, 이 암자에도 나를 스승으로 모시는 모자란 놈이 하나 있지. 지금쯤 산에 들어가 땔감을 줍고 있을 게야. 곧 내려오면 보게 될 게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암자 뒤편 산길에서 동자승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기 키보다 더 큰 나뭇짐을 짊어진 채였다.
그는 땀에 젖은 어깨를 가누며 나뭇단을 부엌 근처에 조심스레 내려놓더니, 곧장 달려와 스님과 호 앞에 서서 깊이 고개를 숙였다.

“장이라고 합니더.”





장이의 손은 어린 동자승답지 않게 야무졌다.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고, 쌀을 씻어 밥을 안쳤다. 남은 쌀뜨물로 소쿠리에 담아둔 채소를 숭숭 썰어 넣고 된장을 풀어 국을 끓였다. 그렇게 그는 작은 손으로 뚝딱뚝딱 소박하지만 정갈한 저녁상을 차려냈다.


저녁을 먹은 뒤, 호와 스님은 자두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차를 나눴고, 양이와 장이는 부엌 부뚜막에 나란히 걸터앉아 누룽지를 씹었다.


"누부야는 와 부처님께 절을 안 하는교? 절에 왔으면 제일 먼저 부처님께 절부터 올리는 기라예."

"스승님이랑 나는 부처님을 모시는 제자가 아니야."

"부처님 말고 다른 신을 모시는교?"

"응"

"어떤 신인데예? 마을 무당처럼 장군신 그런 거 모시는교?“


양이는 고개를 저으며 품 안에서 호가 준 작은 십자가를 꺼내 보였다. 장이는 눈이 동그래졌다. 처음 보는 물건이 당황스러운 듯, 그는 몸을 슬쩍 옆으로 물리더니 곧 얼굴만 바짝 들이밀었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십자가를 이리저리 살폈다.

"... 억수로 힘들어 보이는 얼굴입니더. 와 돌아가신 분을 나무에 저리 매단 채로 두는교? 이리 두면 성불 못 하실 낀데...“


그는 중얼거리며 누룽지 옆에 있던 숭늉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 그래도 염불은 하지예? 아침저녁으로..."

"응, 기도는 해."

"어떤 염불인데예?“


양이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낮게 읊조렸다.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 ...“


순간 장이는 눈이 동그래지며 번쩍 빛났다.

"와! 신한테 아부지라 하는교?"

"응!“


장이는 눈이 크게 떠진 채 몇 번이나 깜빡였다. 그러곤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이내 나직이 중얼거렸다.

"와... 좋겠심더. 억수로 부럽네...“

양이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왜?"


장이가 고개를 떨구며 입술을 달싹였다.

"지는요... 사람들한테 스님, 아제, 아지매, 누부야... 이래 부르는 건 괜찮은데, 어무이, 아부지라고는 부르면 안 되는 기라요. 일전에... 얼굴도 모르는 어무이, 아부지가 얼매나 보고 싶던지...

법당 청소하다가 부처님을 끌어안고 '아부지! 아부지!' 하다가 스님께 얼매나 혼줄이 났는지 모릅니더.

'야, 이눔아! 속세의 인연을 끊어야 한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아직도 못 알아 묵나!' 하시며 빗자루를 들고 뛰어오시는데, 그 길로 뒷산으로 줄행랑을 쳤심더..."


열린 부엌문 너머로 별빛 가득한 밤하늘이 보였다. 장이는 그쪽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사월 초파일 연등제에... 어무이, 아부지가 혹시나 올까 싶어, 매년 지하고 닮은 사람을 찾고 있는데예... 아직 한 번도 못 만났심미더.“

양이도 말없이 고개를 들어 별이 총총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누룽지 소쿠리를 들어, 장이 곁으로 살짝 밀어주었다.


평상 위 자두나무는 활짝 몽우리를 터뜨리고 있었다.

밤하늘로 흩날린 꽃잎은 별빛처럼 쏟아져 내려앉았다가, 바람에 실려 밤공기 속을 부유했다.

스님은 찻잔에 차를 따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 자네가 둔황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서역으로 갔다는 소문은 어렴풋이 들었네.“


그는 천천히 차를 마신 뒤, 호와 자신의 빈 잔에 다시 차를 채웠다. 한동안 말없이 찻잔을 내려다보던, 스님은 고개를 들어 다시 물었다.

"... 모친 소식은 들었는가? 자네가 집을 떠난 뒤, 문중이며 모친이며 백방으로 자네를 찾고 난리가 났었지.”

호는 묵묵히 침묵했다.

그 사이, 바람에 떠돌던 꽃잎 하나가 찻잔에 고요히 내려앉았다. 스님은 그 꽃잎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 왜 돌아왔는가?“

호는 눈길을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글쎄...“




다음 날 아침. 장이는 떠나는 양이와 호를 위해 정성껏 주먹밥을 쌌다.

행랑 주머니에 주먹밥을 하나씩 넣어주고, 대나무 물통에 물이 가득 찼는지도 꼼꼼히 살폈다. 주머니를 건네며 장이는 환하게 웃었다.

“누부야가 생긴 것 같아, 지는 참 좋십니더!”

양이는 그 말에 가만히 다가가 어린 장이를 꼭 안아주었다.


양이와 호는 암자를 뒤로하고 마을 쪽으로 내려갔다. 한참을 걷던 중, 졸졸 흐르는 물소리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두 사람은 그 청아한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장이가 싸준 주먹밥으로 점심을 나누어 먹었다.


소금물로 간을 맞춘 주먹밥 속에는 곱게 다진 오이지가 촘촘히 박혀있었다. 짭조름한 밥알 사이로 씹히는 새콤달콤한 맛은 머지않아 다가올 초여름의 상큼함을 먼저 전해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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