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잊힌 이름들(上)

by 릿다


양이는 호를 따라 한양의 관문인 남대문을 지나 한참을 걸었다. 해가 기울고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두 사람은 북촌의 어느 기와집 앞에 다다랐다.


'톡톡톡-'


호가 문고리를 두드리자 잠시 후 대문이 열리고, 행랑채 아범이 놀란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도련님이 오셨습니다!”

그는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허둥지둥 뒷걸음질로 집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이내 안채가 술렁이며 등불이 하나둘 켜졌고, 어둑하던 마당이 금세 환해졌다.


곧 호보다 한두 살 어려 보이는 청년이 뛰어나왔다.

"형님... 돌아오셨군요!"

청년의 눈가에 눈물이 번졌다.


뒤이어 세월이 곱게 묻은 여인이 대문을 나서며 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도련님, 마님께서 오래도록 기다리셨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웅성거리며 대문가에 모여든 집안사람들을 바라보던 유모가 목소리를 높였다.
“호 도련님이 돌아오셨다. 어서 저녁상부터 차리고, 갈아입으실 옷도 준비하거라!”


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호가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온 것처럼 담담했다.

"어머님은?"

"안방에 계십니다.“


호는 마루를 지나 대칭으로 놓인 두 개의 방 중 한쪽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쪽 찐 머리를 풀어 베갯머리에 늘어뜨린 여인이 누워 있었다. 병색이 완연했다.

바깥의 소란에도 깨어나지 못한 채 약 기운에 잠든 어머니 곁에 앉은 호는 마른 손을 꼭 잡았다. 병환에 시달린 얼굴은 누렇게 떠 있었고, 삼 년 만에 다시 뵙는 어머니의 상한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다.


그 순간, 죄송스러움과 함께 오래전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결국 집을 뛰쳐나오던, 바로 그날의 기억이었다.




삼대독자로 태어난 귀한 아들 호는, 아장아장 걸음마를 떼던 무렵부터 영특하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아이는 늘 서책을 들고 와 어머니 무릎에 앉아 “읽어 주세요”하고 졸랐다. 그런 아이의 모습은 어른들에게는 신기하고도 기특한 구경거리였다. 책을 감추어 두어도 호는 끝내 찾아내어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귀한 집 자손에다 총기까지 겸비했으니, 문중은 물론 집안 어른들의 기대 또한 남달랐다. 호가 네댓 살쯤 되었을 때였다. 방에 들어선 유모의 눈에, 호는 그날도 방바닥에 앉아 책을 펴놓고 진지하게 글을 읽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모! 이 의학 서적이 참으로 재미있어. 나 커서 잡과에 응시해 의원이 될래!"

해맑게 웃는 호의 얼굴은 봄 햇살처럼 환했다.

'짝'

유모의 손이 호의 뺨을 후려쳤다.


작은 얼굴이 휘청였고, 곧 붉게 부풀어 올랐다. 너무 아파 울음이 터질 듯했으나, 호는 울지 않았다. 다만, 눈가에 고인 눈물이 이내 뺨을 타고 흘러내릴 뿐이었다.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한 번만 더 그 말 입에 담으면.. 이 유모는 목숨을 끊겠습니다.“


유모는 말을 내뱉자마자 방 안에 흩어진 의학 서책을 거두어 부엌으로 향했다. 활활 타오르는 아궁이 속으로 책들을 던져 넣자, 종이가 타는 냄새와 함께 바스락거리며 뒤틀리는 소리가 호의 귀를 울렸다. 어린 호는 문간에 서서, 불길 속에 삼켜지는 서책들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때의 호는 알지 못했다. 왜 유모가 그토록 분노했는지.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달았다.

늘 엄하기만 하던 유모를 향해 호의 눈길이 자주 머물던 이유도, 자라면서 굳이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피는 숨길 수 없는 법, 천륜의 끌림이 호의 안에서 조용히 자라나고 있었다.


호의 어머니는 명문 사대부가의 무남독녀였다. 언제나 기품이 넘쳤고, 문중의 어른들은 그녀의 덕을 칭송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호는 알게 되었다. 그 우아한 품격 뒤에는, 차디찬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는 것을. 학식 높고 인품 좋은 아버지는 초야 첫날부터 신방을 찾지 않았다. 시부모의 닦달은 해마다, 계절마다 이어졌다. 훗날 호는 생각했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어머니는 얼마나 깊은 상처를 삼켜야 했을까.


그러던 어느 날, 호는 집안 아랫사람들이 소리 죽여 나누는 속삭임을 들었다. 할머니가 어머니를 불러 전했다는, 누구도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아버지에게 본래 정혼녀가 있었다. 그러나 그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하며 혼사가 깨졌고, 그 여인은 사노비로 전락했다. 세월이 흘러, 아이를 가진 채 다시 나타났다. 아직 새댁이던 어머니는 새벽녘, 떨리는 발걸음으로 그 여인을 찾아갔다고 했다.


그 여인은 어머니를 보자 버선발로 달려 나와 무릎을 꿇었다.
“뱃속의 아이는 죄가 없습니다. 부디 마님의 아이로 길러주십시오.”

그 말에 어머니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지만, 남편의 아이라는데 매정하게 돌아설 수는 없었다.


그날 이후, 어머니는 집안에서 가짜 임산부가 되었다. 입덧을 흉내 내고, 태교를 하며, 태동조차 느낄 수 없는 배를 어루만지며 아기의 탄생을 기다렸다.

가끔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다 놓고 빌기도 하셨다. 비록 자신의 몸에서 자라지 않은 아니었지만, 아이가 자신을 어미로 받아주기를 간절히 기도하셨다.


얼마 후 태어난 아이가 바로 호였다. 그는 명문 사대부 임씨 집안의 장손이었다. 그러나 문중은 노비 출신 유모의 피가 섞였다는 사실을 못내 불편해했다.

어른들은 화근이 될 수 있다며 유모를 내치라 했지만, 어머니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짐승도 제 새끼를 두고는 떠나지 않습니다.”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이 정해졌다. 그날 이후, 피로 맺어진 여인은 유모가 되었고, 가문으로 맺어진 여인은 어머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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