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잊힌 이름들(下)

by 릿다


어머니가 부르신다는 말을 전해 듣고 안방으로 향하던 호는, 대청마루를 내려오는 낯선 박물 장수와 마주쳤다.

머리를 길게 땋아 늘어뜨린 소녀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그러나 처녀다운 수줍음이라곤 없었다. 그녀는 호 곁을 스치며 힐끔 그를 올려다보았다. 호 또한 무심히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옆으로 가늘게 그어진 눈매, 고집스레 다문 얇은 입술. 어째서인지 낯익은 얼굴처럼 느껴졌다.

"도련님! 마님 기다리십니다. 어서 들어가세요."

유모가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다음 날, 서당에서 돌아오던 길. 호는 집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던 그 박물 장수를 다시 마주쳤다. 그녀는 호를 보자 반갑게 다가와 인사했다.

"다시 뵙네요. 도련님!"


익숙한 표정, 익숙한 기색. 그러나 어디서 본 것인지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오늘은 물건을 사 주는 이가 없어 종일 굶었습니다. 헤헤..."

평소 같으면 이런 말에 쉽게 마음을 내주지 않았을 호였지만, 어느새 그는 그녀를 데리고 아는 밥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기뻐하며 뒤따라온 박물 장수는 게걸스럽게 밥을 먹었다.


"배가 많이 고팠나 보오.“

그녀는 총각무 하나를 베어 물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어제저녁부터 굶었어요. 그 댁 마님이 아무것도 안 사 주셨거든요. 아니, 물건 펼치기도 전에 도령 유모한테 쫓겨났다고 해야 할까요?

암튼 나가라고 어찌나 닦달하던지... 사실 마님이 사람 좋다는 소문 듣고 덤터기 좀 씌워볼까 했는데, 앉기도 전에 들켰다니까요!“


박물 장수는 '흐흐흐' 웃으며 바삐 숟가락질을 했다.

"어디서 오셨소?"

"집이 없어요. 그래서 나도 내가 어디서 왔는지 몰라요."

"우리 집엔 처음 온 것이오?"

"왜요? 뭐 그렇게 궁금한 게 많으세요?"


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말했다.

"자주 보는 것 같아서...“

그녀는 입술을 옷소매로 슥 닦으며 웃었다.

"겨우 두 번 뵌걸요. 이집 저집 기웃거리며 물건 파는 년이라, 어디서 본 듯할 수도 있죠.”


묘하게 익숙한 그 표정이 호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는 잠시 그녀의 눈빛을 들여다보다가 낮게 물었다.

"혹시... 전에 나를 본 적이 있소?"


박물 장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름은 알려 줄 수 있소?“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호를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도령! 이년한테 관심 있으신 겁니까?"


호는 얼굴이 붉어지며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박물 장수는 손바닥으로 상을 ‘탁’치며 맞받았다.

"흥, 나도 어린 애송이는 싫거든요. 그리고 아니면 말지, 왜 소리까지 지르세요?

내 얻어먹은 밥만 아니었으면 그냥 확- "


그녀는 상을 뒤엎는 시늉을 하다가, 맞은편에서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는 호의 눈길에 멈칫했다. 무안한 듯 고개를 숙인 그녀가 말했다.

"...업년이오. 내 이름."

"업년이...?"

호는 기억을 더듬었으나, 어디에서도 떠오르는 구석이 없는 이름이었다.


업년이는 씁쓸하게 웃었다.

"도령도 내 이름만 듣고 짐작했겠지요. 그래요, 업둥이로 들어왔다고 해서 업년이라 부르기로 했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름만 들어도 부모에게 버림받은 걸 알 수 있다니. 업년이라니, 업년이가 뭐람...“


말끝을 흐린 그녀는 상 위의 물그릇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곤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자라면서 점점 그 집 대감 얼굴을 빼닮는다고, 집안 사람들이 생트집을 잡더니 결국 마님이 저더러 집을 나가라 하더군요. 노비도 아니니, 가고 싶은 곳으로 가서 살라면서요. 그때부터 여기저기 떠돌며 박물 장수를 하고 있지요.

어느 날은 하룻밤 묵을 곳을 찾다가 예배당에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 시퍼런 눈의 서양 신부가 그러더군요. 예수쟁이가 되면 이름을 새로 지어 준다고. 그래서 나도 예수쟁이가 되어 이름을 새로 받았어요.”


업년이는 괜스레 자랑스럽게 호를 바라보았다.

"알려 드려요?“

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마니아? 마리아?

서역 이름이라 정확한 소리는 모르겠어요. 암튼 '마아니'- 많다는 말 아니겠어요?

지는 갓난둥이 적에 뉘 집 대문 앞에 버려져, 몸에 걸칠 것도, 어미, 애비라 부를 사람도 없이 자랐지요. 그래서 그런지, '많다'는 이 이름이 마음에 쏙 들어요.“


말을 마친 업년이는 밥집 평상에서 고개를 들어 보름달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달빛처럼 환한 웃음을 얼굴에 띄웠다.




그 후로 업년이는 보이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떠난 모양이라 생각하던 며칠 뒤, 호는 대사동(인사동)으로 향했다.

좁은 골목마다 그림쟁이들이 내놓은 화폭이 줄지어 걸려 있었고, 침모들이 만든 조각보며 장신구들이 좌판 위에 펼쳐져 있었다. 골목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답답해진 호는 인파를 벗어나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만 가시라니까요! 댁한테는 안 판다구요. 자꾸 이러면, 저번에 같이 왔던 아낙에게 이른다구요!”


낯익은 목소리였다. 업년이가 어떤 사내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아따, 화를 내니 더 이뻐부네. 집사람은 친정에 애 낳으러 갔어. 이참에 네가 안방 차지 좀 해부러라.“

사내가 은근슬쩍 손을 잡으려 하자, 업년이는 황급히 손을 뒤로 감췄다.


"야 이것아! 박물 장수로 떠돌아다녔으면 손이야 여럿 탔을 터인데, 뭔 규중 아씨 흉내를 내? 이년이- 확, 오늘 내 손에 죽고 잡냐?"

사내가 험악한 얼굴로 손을 치켜들자, 업년이는 ”엄마야-!“ 하고 소리치며 얼굴을 감췄다.

그 순간, 가까이 다가선 호가 물건 앞에 쭈그리고 앉은 사내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아야야야야-! 아이고, 나 죽네... “

사내는 배를 움켜쥔 채 땅바닥을 몇 바퀴나 구르며 신음했다. 숨을 몰아쉬며 눈을 부라리더니 소리쳤다.

"누구야! 누가 날 찼어?!"

"내가 찼다! 약값은 북촌 임 대감 댁에 가서 받아 가거라!“


사내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며 호 앞을 지나가다, 잘 들리지도 않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썩을 년... 사내가 있으면 진즉에 말을 했어야지."


업년이는 주섬주섬 소쿠리에 물건을 담기 시작했다.

"도령.... 고마워요. 도령 아니었으면 오늘 큰 봉변 당할 뻔했어요.“


후드득...

물건을 정리하던 업년이의 손등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잠시 후, 지나가던 행인들이 발걸음을 늦췄다. 그러나 노골적으로 바라보지 못한 채 이리저리 눈길을 피하며 힐끔거렸다.


꾀죄죄한 처자가 흙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고 있었다. 그 곁에는 말끔히 차려입은 귀한 집 도령 같은 소년이 앉아 있었다. 호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그녀의 울음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사람들 눈에는 그 모습이 어딘가 괴이하고도 슬프게 비쳤다.




며칠 뒤, 서당에 가려고 집을 나선 호 앞에 언제부터 기다렸는지 모를 업년이가 달려왔다. 새벽 찬 이슬에 흠뻑 젖은 모습이었다.


"도령- 나 멀리 가요.

그때 내 이름 지어 줬던, 눈알 시퍼런 신부 따라가려고요. 아마 이게 마지막일지도 몰라요. 그래도... 천한 내가 도령과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참 기뻤어요."


업년이는 처음으로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품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 호에게 내밀었다. 호가 주머니를 열어 보니, 안에는 열십자 모양의 나무토막이 있었다. 그 위에는 작은 사람 형상이 정성스레 새겨져 있었다.


"이게 내가 믿는 천주예요. 도령에게 주고 싶었어요."

업년이는 웃음 같지 않은 웃음을 지으며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모퉁이를 돌더니, 끝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호는 설명하기 어려운 허전함과 아쉬움에 사로잡혀, 그녀가 사라진 골목 어귀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다음 날 이른 아침, 관아에서 전갈이 왔다. 누군가 강가에서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 죽었는데, 일전에 그와 함께 있던 호를 보았다는 이가 있어 혹 아는 사람인지 확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관아의 검안실.

호는 그곳에서 업년이가 싸늘한 시체로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 그 얼굴에서 호는 유모의 모습을 보았다.


그제야 호는 깨달았다. 업년에게서 느꼈던 낯익음의 정체가, 피붙이의 흔적이었다는 것을.


'쾅-!'

호는 거칠게 유모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유모가...

유모가 그리 못 할 짓을 하지 않아도, 그녀는 떠난다고 했는데... 왜! 왜 그렇게까지 한 겁니까?

어찌 그리 모질 수가 있단 말입니까!

내가 사내가 아니었으면... 유모는 나에게도 그랬겠지요?"

유모는 손에 들고 있던 바느질을 멈추고 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의 거친 외침에 놀란 어머니가 안방에서 뛰쳐나왔고, 집안사람들도 하나둘 유모방 앞에 모여들었다. 그럼에도 유모는, 앉은 자리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호는 끝내 참지 못하고 방을 박차고 나와, 그대로 집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지금-

삼 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어머니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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