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양이를 데리고 북촌 내리막길을 내려와 청계천을 건너 종로로 향했다. 밤은 깊었고 골목 어귀마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으나, 그의 걸음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발길에 익은 길인 듯, 곧장 걸어가더니 ‘病院’이라 새겨진 현판이 걸린 집 앞에서 멈춰 섰다.
문을 밀자 행랑채 쪽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잠시 후 달이 어멈이 허둥지둥 달려 나왔다.
"도련님! 와 이제 오십니꺼. 저녁상 봐둔 지가 언젠데, 북촌 다녀오신다고 늦으셨습니꺼?"
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곁에 선 양이를 가리켰다.
"이 아이는 양이라네. 비워 둔 방으로 데려가 주게.“
그 순간, 양이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곳에서 지내게 되는구나.’
낯선 공간이 주는 두려움은 여전했으나, 그 한켠에서 알 수 업는 잔잔한 기대가 피어올랐다.
호가 덧붙였다.
"오늘은 이만 쉬거라.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나누자꾸나.”
양이는 말 대신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작은 몸짓을 확인한 호는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다시 북촌 본가로 발길을 돌렸다.
종로 시장 끝자락에 자리한 의원은 겉보기엔 허름했으나, 안으로 들어서면 의외로 정갈하고 깨끗했다.
바깥채와 안채가 마주 보고 서 있었고, 그 사이로 작은 마당이 놓여 있었다. 마당 한쪽에는 우물이, 그 옆에는 반질반질 닦인 장독이 단정히 줄지어 있었다.
양이는 서양식 의원을 처음 보았다. 낯설고도 신기한 눈빛으로 약장과 의기(醫器)들을 둘러보았다. 그때 문이 열리며 호가 들어섰다.
"지내는데 불편한 건 없었느냐?"
"편히 잘 잤습니다."
"다행이구나. 여기 와서 잠시 앉아 보거라.“
호가 책상 앞 의자를 가리키자, 양이는 조심스레 앉았다. 창문 틈으로 스며든 햇살이 약병의 유리병을 비추며 희미하게 반짝였다.
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나는 이곳에서 의원을 열 생각이다. 너는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양이는 책상 끝을 바라보다가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스승님 곁에서 조금 더 배우고 싶습니다.”
호는 잠시 곤혹스러운 기색을 보이며 말을 꺼냈다.
“나는 누구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못 된다. 그저 의술이란 잡기를 다루는 자에 불과하다. 진정 배움을 원한다면... 다른 스승을 알아봐 줄 수도 있다.”
양이는 고개를 들었다. 늘 조심스러웠던 눈빛이었으나, 이번만큼은 단호했다.
“부담이 되시더라도, 저는 스승님 곁에서 제 길을 찾고 싶습니다.”
호는 잠시 시선을 피했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의원에도 손이 필요하니, 나를 도우며 차근히 앞일을 생각해 보자꾸나.”
그 말에 양이의 얼굴이 환히 빛났다. 그녀에게 다른 바람은 없었다. 그의 곁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또 해 보고 싶은 일은 없느냐?”
양이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말을 더 배우고 싶습니다. 언문과 한자는 익혔고, 일본 글도 조금은 읽고 씁니다. 그래서 한때는 세상 글자를 다 아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스승님의 책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저 우물 안 개구리였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가, 이내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스승님의 서책에 적힌 글들은 모양부터 낯설었습니다. 그 글에도 분명 소리와 뜻이 있겠지요. 저는 그 소리가 어떻게 입에서 흘러나와 세상에 퍼지고, 또 어떻게 사람의 마음에 닿는지 알고 싶습니다.”
호는 양이의 말을 곱씹듯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낮게, 그러나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 그 글자들이 너에게는 그렇게 보였구나. 네 마음이 그렇다면, 글을 배울 수 있는 길을 한 번 모색해 보자.”
그때, 달이 어멈이 앞치마로 손의 물기를 훔치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호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어멈도 이리 와 잠시 앉아 보게.“
그는 양이 곁에 의자를 하나 더 놓으며 말을 이었다.
"일전에 부탁한다던 아이가 바로 이 아이일세. 양이가 이곳에 자리 잡는 동안, 자네가 곁에서 잘 보살펴 주게. 부탁하네.”
"물론이지예. 누구 부탁인데예-"
어멈은 푸근하게 웃으며 양이를 바라보았다. 양이는 그 시선을 받자 살짝 고개를 숙였다.
호는 다시 양이와 어멈을 향해 차분히 덧붙였다.
"나는 낮에는 이곳에서 환자를 돌보지만, 어머님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저녁이면 북촌 본가로 가야 하네. 괜찮겠는가?“
달이 어멈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지한테 맡기시고, 안심하고 다니셔도 됩니더."
그 말을 듣는 순간, 양이의 가슴 한켠이 서늘히 식었다. 곁을 지켜주던 호가 밤이면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알 수 없는 허전함을 남겼다.
진료
"고름이 깊어 살가죽을 절개해야 합니다.”
"아이고 흉측해라! 어찌 사람 살을 찢는다 하십니까. 남정네 앞에서 속살 내놓은 것만으로도 서방이 알면 난리칠 텐데... 살가죽까지 찢는다 하면, 저는 정말 죽습니다요.“
호는 얼굴빛이 굳어지며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이대로 두면 살이 썩어 팔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어깨 통증이 심해 참다가 오신 것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때 달이 어멈이 툭 끼어들며 거즈를 들어 보였다.
"팔 빙신 되고 울고불고 하지 말고, 선상님 말씀 잘 들으소 마! 그짝은 지금 등짝이 안 보이서 그런 기라.
여기 좀 보이소, 이 천 쪼가리 보이지예? 고름이 한 바가지요. 한 바가지!”
호는 담담히 설명을 덧붙였다.
"살을 찢는다고 해도, 고름을 파내고 종기의 뿌리를 걷어내는 것뿐입니다. 겁내지 마십시오. 치료가 끝나면 붕대만 갈아주고, 소독만 제때 하시면 됩니다.“
아낙은 여전히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곧 호가 메스를 들어 종기의 깊은 고름을 짜내고 상처를 소독하는 동안, 양이와 어멈은 곁에서 부지런히 손을 거들었다.
부분 마취를 했음에도, 아낙의 얼굴에는 고통이 서렸다. 이마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혔다. 호의 손끝은 정교했고, 그 움직임은 단단했다. 양이는 그 모습을 숨죽여 바라보았다.
그녀는 깨끗한 천으로 아낙의 이마에 맺힌 땀을 정성스레 닦아주었다. 치료를 마친 여인이 문을 나서려 할 때, 호가 작은 비누 한 조각을 내밀었다.
"이걸로 꼭 손을 씻으십시오. 특히 음식을 만지실 때나 밖에서 놀다 들어온 아이들 손은 반드시 비누로 씻게 하셔야 합니다.”
아낙은 놀란 눈으로 비누를 받아 들며 머뭇거렸다.
"아이고... 이런 걸 저 같은 사람이 받아도 되겠습니까. 천한 저희한테 돈도 안 받으시고, 이 귀한 비누까지 주시니... 정말 염치가 없습니다요.
사실 옆집 점이네가 “돈이 없어도 치료를 해 준다.” 해서 와 보기는 했는데, 겁이 많이 났습니다. 돈도 없이 의원 문턱을 넘으려니, 부끄럽고, 혹여 혼이 나지 않을까 싶어 마음이 조마조마했지요.“
호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몸이 아픈 데 천하고 귀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이곳에는 아픈 사람만 옵니다. 몸이 아프면 언제든 오십시오. 그리고 삼일 뒤에는 꼭 오셔서 상처를 다시 소독받으셔야 합니다.”
말을 마친 호의 얼굴에, 드물게 미소가 번졌다.
양이와 달이 어멈은 호에게서 배운 대로 마당 한쪽 가마솥에 양잿물을 풀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 큰 주걱으로 휘휘 저어 만든 비눗물에서는 뽀얀 거품이 일었다.
양이는 옆에서 바가지로 비눗물을 떠 틀에 부었다. 굳으면 잘라 사람들에게 나눠줄 작은 조각들이 될 터였다.
달이 어멈은 주걱질을 멈추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의원에서 쓰는 물건이랑 약재도 다 돈이 드는 긴데... 도련님은 와 병자들한테 돈을 안 받는 교?
없이 사는 사람 치고 돈 있다 하는 사람, 세상에 드문 기라예. 그 말 곧이곧대로 믿고 안 받으면, 의원 살림은 뭐로 꾸리신단 말입니꺼?
참말로 걱정입니더. 우리 도련님, 그동안 이 나라 저 나라 떠돌며 무슨 일을 하신 건지, 세상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카이.“
어멈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시 주걱을 힘주어 휘휘 저었다. 양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말했다.
“그 마음, 스승님도 다 아실 거예요. 하지만... 사정 딱한 사람들을 그냥 두고는 못 지나치시는 분이시잖아요.”
달이 어멈은 그런 양이를 한참 바라보다가, 푹 한숨을 내쉬며 주걱을 내려놓았다.
"도련님이 맨날 하시는 말씀 있잖아예. 속꼬쟁이를 달라 카면, 거죽옷까지 벗어 주라 카는 거... 내는 그 말이 참 해괴하다 카이.
남이 입던 속꼬쟁이를 와 달라 카노, 더럽꾸로. 그라고 속꼬쟁이 달라 했으면, 그 속꼬쟁이만 받으면 되는 기지. 근데 벗어 주는 사람이 물러터져서 거죽옷까지 벗어 준다꼬, 그걸 덥석 받는 건, 얌체가 없어도 너무 없는 기라.
안 그렇습니꺼, 양이 아씨? 내말 틀린 기라요?“
양이는 대답 대신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솥 위로 피어오른 하얀 거품이 햇살에 부서지듯, 바람에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