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살아 있다는 것은

by 릿다


양이는 호의 주선으로 서역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 배화당에서 글을 배우게 되었다.

댕기 머리를 한 아이들 사이에 앉아, 생전 처음 ‘펜’이라 불리는 나무 막대기를 손에 쥐었다.

A, B, C...

알파벳을 또박또박 써 내려가며 글자 하나하나에 마음을 담았다. 마치 어머니의 기대 어린 눈빛을 받으며 처음 붓을 들던 그 날처럼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손으로만 쓰지 말고, 입으로 소리를 내야 합니다."

글을 가르치던 신유 선생이 부드럽게 일렀다.

한양에 처음 왔던 날, 호의 집에서 스쳐본 얼굴이었다. 배화당에서 다시 만난 신유는 반가움 눈빛으로 인사를 건네며, 자신이 호의 사촌임을 밝혔다.


양이는 그를 바라보았다.
단정한 눈매와 곧은 인상, 잔잔한 웃음. 곁에 있으면 마음이 느슨해졌다. 그러나 그 미소 너머에는 오래된 그늘이 어른거렸다. 가슴속 깊은 상처가 아직 지워지지 않는 듯했다. 양이는 그것이 부모 잃은 아픔에서 비롯된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배움은 즐거웠다. 양이의 눈에는 아이처럼 반짝이는 빛이 어렸다.

"참 영특하십니다. 아주 빠르게 글을 익혀 가고 계십니다."

신유의 목소리에는 따뜻한 감탄이 묻어 있었다. 양이는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웃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신유의 입가에도,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번졌다.


창문 밖으로 서쪽 햇살이 기울어가고 있었다.




글공부를 마친 뒤, 신유는 양이를 데리고 본정(명동)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종이와 글공부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 양이에게 건네며 말했다.

"형님이 저더러 대신 준비해 주라 하셨습니다.“


한양에서의 저녁 나들이는 양이에게 처음이었다. 대문마다 걸린 등불이 거리를 환히 밝히고, 저잣거리에는 웃음과 말소리가 흘러넘쳤다.

양이는 쓰개치마를 내려 얼굴을 드러낸 채 천천히 걸었다. 시원한 밤바람이 뺨을 스치자, 낯설지만 상쾌한 기운이 마음 깊숙이 스며들었다.


서책방에 들른 신유는 낮에 눈여겨보았던 책을 사고, 양이에게도 한 권을 사 주었다. 그들은 달빛이 고요히 내려앉은 골목을 나란히 걸으며 책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양 글은 조선말이나 한자와 달리, 글자를 나열해 읽어야 합니다.“


신유가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저는 그걸 몰라서 처음엔 꽤 애를 먹었지요. 서양 사람 말을 들으면 분명히 소리를 내고 있는데, 제 눈에는 마치 입만 뻐끔거리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어떤 순간엔 세상이 멈춘 듯, 그들의 입술만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신유는 일부러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몸짓으로 그때의 모습을 흉내 냈다. 양이는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달빛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정답게 이어져 길 위를 걸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신유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렇게 어려운 글을 배우고 싶으신 이유가 있습니까? 형님 때문인가요?“


양이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았다가, 다시 길가의 등불을 바라보았다.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머뭇거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람은 태어나 처음엔 말없이 세상을 바라보다가, 어느 날 처음 내뱉은 말로 자기 자리를 찾는대요.

서툰 목소리로 ‘어머니, 아버지’ 하고 불러 보는 그 순간, 비로소 누군가가 내 말을 들어 주잖아요.

그때 알게 되죠. ‘아, 나도 이 집의 사람이구나.’


그게 아마, 우리가 세상과 이어지는 첫 번째 순간일 거예요. 말은 그걸 가능하게 해 주니까요. 누군가 내 말을 들어 주면, 그제야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게 실감 나잖아요.”


양이는 잠시 숨을 고르고, 조용히 웃었다.

“그래서 저는 말이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사람 마음이 오가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그 길 위에서 서로의 마음이 닿을 때... 비로소 온기가 생기는 거죠.”


얼굴이 붉어진 듯 고개를 숙인 양이는, 잠시 숨을 고르고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물론, 스승님이 읽으시는 서책이 제 눈길을 사로잡은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는 그 글자 너머의 낯선 나라의 말들을 통해... 다른 세상 사람들과도 마음을 나누고 싶었어요. 그래서 더 넓은 세상과 이어지기를... 늘 꿈꿔왔지요. 그게, 제가 글을 배우고 싶은 까닭이에요.”


말을 마친 양이의 볼이 은은히 물들었고, 눈빛은 별빛처럼 반짝였다. 신유는 그 빛에 잠시 눈을 떼지 못했다. 차가운 달빛이 비추던 그의 마음 한켠에, 아주 미세한 온기가 스며들었다. 오랫동안 어둠만 머물던 그곳에서, 파릇한 연정의 싹이 조용히 돋아나고 있었다.





이렇게 한양에서의 양이의 나날은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달이 어멈은 찹쌀풀을 묻힌 김을 말려 기름에 튀겼다. 노릇하게 부각이 부풀어 오르자, 말린 무말랭이를 무쳐 내고, 된장에 박아 두었던 장아찌와 소고기 장조림까지 정갈히 담았다. 정성껏 만든 찬들을 보자기에 차곡차곡 싸서 양이에게 건네며 말했다.


"도련님 기다리십니더. 얼른 가 보이소."

"고마워요! 마호 신부님께서 달이 어머니 찬이 제일 맛있다고 칭찬하셨어요.“


어멈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활짝 웃었다.

"하모, 당연하지예. 내가 만든 음식, 맛없다는 소리 들어 본 적 없습니더.”


달이 어멈의 배웅을 받으며, 양이는 호와 함께 예배당의 마호 신부님 댁으로 향했다. 길을 걸으며 조금 전 부엌에서 나눈 이야기를 호에게 들려주었다.

호는 잔잔히 웃음을 고개를 끄덕였다.

"어멈 솜씨는 어머니도 인정하시지.“


양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의원에서 달이 어머니를 거들다 보면, 그분이 늘 그러세요. 사람은 먹고, 입고, 자는 일이 제일 중하다고요. 처음엔 그 말이 그냥 살림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요즘은 알 것 같아요. 그런 일들이 결국 사람을 살게 하는 거구나, 싶어요. 그래서 이제는 그런 것들을 소중히 배우고 있어요.”


호가 빙긋 웃더니, 잠시 생각을 더듬듯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 내가 한때 집을 나와, 무작정 떠난 적이 있단다. 중국 땅을 헤매며 실크로드 상인들을 따라다니기도 했지. 짐을 나르며 몇 푼 벌기도 하고, 도적을 만나면 칼을 휘두르기도 했다. 사막의 모래바람 속에서, 죽음을 곁에 두고 살던 시절이었지.“


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둔황 근처에서 강도를 만났단다. 가진 것은 물론, 입고 있던 옷까지 다 빼앗겼지.

얼굴이 알려질까 두려워 휘두른 칼끝에 내가 찔렸어. 피는 끝도 없이 흘러내리고, 눈앞은 금세 어두워졌지.

‘아, 여기서 끝이구나’ 그렇게 생각했단다.”


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때를 떠올리는지, 그의 옆얼굴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때까지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손이 내 뜻과 달리 움직이더구나. 몸은 식어 가는데, 피는 멎질 않았지. 지나가던 나그네의 발목을 붙잡았어. 살려 달라는 말 한마디도 못 했지만, 손가락이 그 옷자락을 끝내 놓지 않았지.”


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삶에 대한 미련이 날 붙든 걸까.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딱딱한 돌침대 위였단다. 몸은 여기저기 실로 꿰매져 있었지. 마치 기운 누더기 옷처럼.”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낮게 숨을 내쉬었다.

“사막 끝자락의 작은 수도원에서, 나는 새 생명을 얻었단다. 그들은 ‘일하지 않는 자 먹지 않는다’는 말을 늘 입에 올렸지. 매일같이 모래바람 속에서 일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며 식탁에 둘러앉았어.”


호의 시선이 멀어졌다.

“나는 상처가 아물지 않아 한 달 내내 물과 멀건 죽만 삼켰단다. 그러다 처음으로 딱딱한 빵과 푸성귀를 입에 넣었을 때 알았지.

‘아, 내가 아직 살아 있구나.’

씹어서 맛을 느끼고, 삼킬 수 있다는 사실이,,, 그토록 감사한 줄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렇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나는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 그들과 함께 기도하고, 일하고, 먹었단다. 해가 지면 모래바람이 수도원 벽을 두드렸고, 새벽이면 종소리가 메마른 하늘을 울렸지. 내게 신에 대한 감사와 믿음은 그렇게 찾아왔단다.”


호의 목소리는 낮고 잔잔했지만, 그 안에는 깊은 떨림이 스며 있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손을 내밀어 준 그들은, 죽어가던 나를 살려 주었을 뿐 아니라, 기꺼이 의술까지 가르쳐 주었지.


사람의 내장과 살가죽을 이어 생명을 되살리는 그들의 손길을 보며, 나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 목마름이 서서히 풀려 가는 걸 느꼈단다.


그렇게 배운 의술이 내게 또 다른 삶이 있음을 일깨워 주었고, 그 덕분에 나는 마침내 조선의 집으로 돌아올 명분을 얻을 수 있었지.”


호의 지난 고통이 생생히 전해져 오는 듯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양이는 눈을 감았다. 보지도 못한 사막의 열기와 모래가 자신을 덮치는 듯했다. 그를 스쳐 간 뜨거운 바람이, 이제 그녀를 휘감으며 스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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