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 양이는 호의 본가로 세배를 드리러 갔다. 수척한 얼굴의 호의 어머니는 반가운 미소로 양이의 손을 잡았다. 인사를 마친 뒤에도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양이는 잠시 머뭇거리다 부엌으로 향했다. 집안일을 돕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부엌 안에서는 유모와 찬모가 떡국을 끓이고 있었다. 만두가 동동 뜬 국물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유모는 양이의 발소리를 들었지만, 모른 척 국을 저었다.
“안에서 계시지, 왜 추운데 나오셨어요?”
찬모가 다가와 공손히 속삭였다. 이내 유모의 눈치를 살피며 양이를 부엌 밖으로 데리고 나가 조심스레 말했다.
“여긴 손이 넉넉합니다. 어서 들어가셔서 마님과 이야기 나누세요.”
그때 부엌문이 덜컥 열리며 유모가 주걱과 대접을 들고 나왔다. 그녀는 말없이 장독대로 향했다. 양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뒤를 따랐다.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된장을 뜨던 유모의 손이 멈췄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양이를 바라보았다.
“아씨가 어떤 분인지는 몰라도, 나는 도련님을 먼저 챙겨야겠소. 시집도 안 간 처자가 사내 곁을 맴도는 건 도련님 앞날에 득 될 게 없지요.
도련님을 위한다면... 어여 집으로 돌아가든지, 따로 거처를 정하는 게 옳을 게요.”
짧고 단호한 목소리에 장독대 주변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스스로 집을 떠나 홀로 섰다고 믿었으나, 그 믿음조차 타인의 시선 위에 놓여 있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양이의 마음이 서늘히 저며왔다.
유모가 부엌으로 돌아가자, 기척도 없이 신유가 다가왔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양이의 손목을 잡아 대문 밖으로 이끌었다.
“왜 이러세요?”
놀란 양이가 몸을 빼자, 신유는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상처 입은 이를 향한 연민이 어려 있었다.
“그런 말을 왜 듣고 계십니까? 이유 없이 비난받는 건... 분명 억울하셨을 텐데, 왜 참으셨습니까?”
양이는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저었다.
“다 맞는 말인걸요.”
그 한마디에 신유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 겉으로는 분노처럼 보였으나, 그 깊은 곳에는 설명할 수 없는 애틋함이 스며 있었다.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한 감정을 눌러 담은 채, 신유는 그 자리에 서서 돌아서는 양이를 바라보았다.
양이는 그를 뒤로한 채 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당을 지나며 잠시 멈칫했으나, 곧 안방으로 향했다.
호의 어머니는 양이의 손을 잡아 아랫목에 앉히며 다정히 말을 건넸다.
“호 의원 일을 거든다지? 그래, 힘이 많이 들지... 병든 사람을 상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도 몸을 앓고 나서야 알았다. 괜스레 짜증만 늘어 집안 사람들에게 미안하기 그지없구나.”
그녀는 양이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혼잣말하듯 말을 이었다.
“신유가 그러던데, 양이는 여인이지만 배운 것도 많고 학식도 높다지?”
양이는 얼굴이 달아오르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호의 어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아니야, 달이 어멈도 일전에 와서 그러더구나. 언문에도 능할 뿐 아니라 요즘은 서역 말까지 배운다지? 아직 나이도 어린데, 참으로 대견해.”
그녀는 양이 곁으로 다가와 손을 꼭 잡았다.
“얼굴도 어찌 이리 꽃처럼 곱단 말이냐.”
양이의 얼굴이 붉게 물들자, 호의 어머니는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양이를 보니 괜스레 말이 많아진다. 성품도 얌전하고, 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네가 좋아서, 나도 모르게 수다쟁이가 돼버렸네.”
그 순간, 양이의 마음에 어둠 속에서 통곡하던 친어머니의 모습이 겹쳐졌다.
‘꽃 같은 내 딸...’
늘 그렇게 불러주시던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자, 눈물이 왈칵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양이는 눈물이 번지지 않도록 눈을 깜빡이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손끝의 떨림을 감추며, 애써 웃음을 머금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잠시 후, 호와 함께 본가를 나서려던 찰나 문중 어른들이 들어섰다. 당숙은 호를 보자마자 헛기침을 하며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도포자락을 ‘탁’ 치며 굳은 얼굴로 스쳐 지나갔다.
호는 그 뒷모습을 향해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양이는 우울한 기색을 감추려 고개를 떨구었다가, 이내 호의 얼굴을 살폈다. 넓은 어깨가 어쩐지 움츠러든 듯 보여, 괜스레 마음이 저려왔다.
“형님—!”
북촌 길 어귀를 막 벗어나려는 순간, 멀리서 신유가 달려오며 두 사람을 불렀다.
“마호 신부님 댁에 가시는 길이지요? 이걸 가져가세요. 큰어머님이 직접 싸 주신 겁니다. 직접 빚으신 술이에요.”
호의 굳었던 얼굴이 그제야 누그러지며,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그 모습을 본 양이의 마음도 함께 밝아져, 환한 목소리로 말했다.
“북촌 마님 술 빚는 솜씨는 조선 제일이라더군요. 스승님, 마호 신부님께서 무척 기뻐하시겠어요.”
호는 미소로 답했다. 그 모습을 곁눈질하던 신유가 양이를 힐끗 보며 덧붙였다.
“큰어머니 솜씨는 술만이 아니라 음식도 으뜸이지요.”
말을 내뱉으며 신유는 은근히 양이를 바라보았다. 혹여 자신의 말에 화답해 줄까, 기대가 섞인 환한 웃음이었다. 그러나 양이는 오직 호만을 향해 다정히 웃고 있었다.
그 순간, 신유의 미소는 서늘히 굳었다. 입가의 온기가 사라진 자리에 알 수 없는 그림자가 스며들었다. 가라앉는 마음이 싫어, 그는 일부러 활기찬 걸음으로 집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서는 당숙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한 장사치마냥 저자거리에서 의원 노릇이나 하다니, 임씨 가문의 체통이 말이 아닙니다. 사대부 집안에서 이 무슨 해괴한 일입니까. 제가 문중 어른들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이내 호의 어머니의 나직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조선도 변해가고 있지 않습니까. 서역 사람들도 이제 거리를 활보하고 있답니다. 호가 서역에서 공부를 많이 해서 의원이 되었으니, 그 또한 장한 일이지요.”
당숙은 얼굴이 붉어지며 목소리를 높였다.
“형수님이 이리 감싸고 도니 호가 저리 제멋대로인 겁니다. 아무리 천한 피를 물려받았다 해도, 이리 티를 내다니 통탄할 노릇입니다.”
호의 어머니는 혹여 밖에서 유모가 들을까 마음이 철렁했다. 좌불안석한 채, 손끝으로 옷자락만 만지작거렸다.
그때, 바깥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신유가 부엌에서 나오는 유모를 보며 말했다.
“당숙어른, 상 들어갑니다.”
그 한마디에 당숙은 헛기침을 하며 못내 아쉬운 듯 입을 다물었다. 방 안에는 잠시, 눌린 숨결만이 남았다.
잠시 뒤, 마호 신부님의 댁에 도착하니 달이 어멈이 마당에서 손님들에게 얼마 전 만든 비누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양이와 호가 들어서자, 모여 있던 이들이 일제히 반가운 얼굴로 맞이했다.
그들 중에는 얼마 전 의원에서 종기 수술을 받았던 아낙도 있었다. 그녀는 호를 보자 얼굴을 환히 밝히며 다가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 덕분에 어깨가 이제 멀쩡해졌습니다. 게다가 주신 귀한 비누로 몸을 씻었더니, 서방이 냄새 좋다며 어찌나 좋아하는지요. 이러다 없는 살림에 입 하나 더 늘게 생겼습니다.”
수줍게 말을 잇는 여인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자, 주위에서도 “좋겠다.” “우리도 비누로 몸 한번 씻어 보세.” 하며 농까지 주고 받았다.
비록 살림은 빠듯하고 하루하루 버거웠지만, 그날만큼은 모두가 함께 웃으며 마당 가득 웃음꽃을 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