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쿠마모토성의 겨울

by 릿다


이른 새벽, 성 아래는 술렁임으로 가득했다. 바람에 실린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 군마의 발굽, 사내들의 거친 고함이 뒤얽혀 새벽 공기를 흔들었다.


나가야 사람들도 서둘러 일어났다. 거친 조와 보리가 섞인 밥을 허겁지겁 삼킨 뒤, 평소보다 일찍 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성문이 느리게 열리자, 북소리와 함께 묵직한 함성이 터졌다.

“가토님이 출병하신다!”


기요마사의 말이 위엄있게 걸어 나왔다. 단단한 갑옷에 온몸을 감싸고, 틈새로 번뜩이는 눈빛만 드러났다. 그 뒤를 타케시가 따르고, 좌우로는 가신 아이다와 모리모토가 어깨를 맞추며 호위했다.


그때 사람들 사이로 낮은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도요토미 아들을 차지하겠다며, 미츠나리와 도쿠가와가 맞붙는다네.”


나가야 사람들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요토미의 어린 아들을 병아리 알처럼 품고 있던 그 족제비와 도쿠가와 너구리가 야마토를 서로 차지하겠다고 난리를 피운다지.

...근데 말이오. 우리 조선사람 팔자도 참 기구하지 않소. 제 나라의 전쟁도 끝내지 못한 놈들에게 당해, 그 손에 끌려와 포로 신세가 되었으니... 생각할수록 한탄스러운 일이지.”

“그러게 말이야...”

출병 대열이 코앞을 스쳐 지나가자,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벽 쪽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정치적 계산 속에서 세키가하라 전투에 직접 나설 수는 없었지만, 동군(東軍)의 부름을 받은 가토 기요마사는 군말 없이 아들 타케시와 히고의 병사들을 이끌고 서둘러 길을 나서고 있었다.


기마병 틈새로 가토 가문의 깃발이 크게 펄럭였고, 그 뒤로 병사들이 길게 줄을 이었다. 단단한 갑옷으로 무장한 군졸도 있었지만, 그 사이사이로 허름한 노렌(가게천막)을 뜯어 어깨에 걸친 자, 도롱이를 아무렇게나 덧입은 자들도 눈에 띄었다.


“저 병사들 좀 봐. 자기 가게 노렌을 뜯어 걸친 데다 도롱이까지 입었네.”

“저쪽은 카카시(허수아비) 옷을 벗겨 입었구먼.”

나가야 사람들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밥 먹듯 전쟁을 하고, 나갈 때마다 집안 돈을 다 긁어모아 갑옷이며 무기를 장만해야 한다니... 없는 살림에 기가 막힐 노릇이지.”


“평민이 출세할 길이라곤 전쟁터에서 목숨 걸고 이기는 것밖에 없다잖아. 저들이나 우리나, 사는 건 매한가지지.”

“그래도 전쟁에 나가지 않으려면 군포를 받쳐야 하는 조선보단 낮지 뭐야. 백성이 원치 않으면 억지로 끌고 가지는 않는다더라.”

“그려? 그건 또 부럽네.”

“하지만... 저 꼴을 보니, 없이 사는 사람들 인생은 어디나 다 똑같은가 봐.”


성곽 주변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그들이 말한 것처럼 나가야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다. 말을 주고받는 사이 바닷바람이 추적추적 가을비를 몰고 왔다. 비가 잦은 히고 지방의 길은 금세 질퍽해졌고, 돌을 끌어다 놓는 일은 더욱 더뎌졌다.


구마모토성의 축성은 거대한 돌을 하나하나 쌓아 올리는 지난한 공사였다. 기요마사가 출전한 틈을 타, 성축도감(築城都監) 마루야마는 조선인들을 더욱 가혹하게 다그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노골적인 경멸이 배어 있었다.
“빨리 움직여! 거기, 돌을 안 옮기고 뭐 하는 거야?”

재복이가 숨을 몰아쉬며 맞받았다.
“이 돌, 우리가 다 옮겼다니까! 너희 야마토 놈들이나 일 좀 해!”

그의 거친 조선말이 공기를 싸늘하게 얼어붙게 했다. 부엌에서 물단지를 들고나오던 아키는 마루야마의 험악한 얼굴을 보자, 잽싸게 다가와 재복이의 말을 듣기 좋게 돌려 전했다.


그 말에 마루야마는 코웃음을 치며 비웃듯 말했다.
“그래서? 이 돌이 너희가 옮겼다는 걸 어떻게 증명하지?”


그때 아키의 아버지 마에다가 눈치를 보며 슬며시 입을 열었다.
“돌에 표시를 해두는 건... 어떨까요?”
“표시?”

누군가가 피식 웃었다.

칠곡이가 나서며 말했다.
“그것도 괜찮지요. 조선 글자 새겨둬도 저들이 읽을 리 없으니... 두고 온 우리 딸래미 얼굴이라도 그려 두지 뭐.”


그 말에 사람들은 피식 웃으며 하나둘 돌 위에 표시를 새기기 시작했다. 굳은 돌에 선을 남기기는 쉽지 않았지만, 모두 칠곡이를 따라 각자의 모양을 억지로라도 그려 넣었다. 둥근 얼굴에 웃는 입, 팔과 다리를 단순한 선으로 그린 아이의 그림은 서툴렀지만, 그 안에는 고향에 두고 온 자식들을 향한 그리움이 배어 있었다.

잠시 후 마루야마가 말린 토란과 박고지를 들고 와 명령했다.

“이걸 돌벽 속에 넣어라.”

억쇠할아범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이걸... 돌벽 속에요? 박고지까지 말아서?”


그러자 마에다가 얼른 말을 거들었다.

“박고지는 돌벽에 넣고 남은 건, 다다미 짤 때처럼, 나무판 위에 한 겹씩 깔아서... 볏짚을 짜듯 넣으라십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러나 마루야마는 짧게 내뱉었다.

“다이묘의 명이다.”


“이 성의 다이묘는 미친 게 틀림없어. 돌벽 틈새에 토란을 왜 집어넣으라는 거야? 거기다 박고지까지?”
“그게 다 울산왜성에서 겪은 일 때문이라잖아요. 그때 조선 병사들이 물길을 막고 식량을 끊어서, 성안에 갇힌 왜놈들이 항복 직전까지 갔다지요.”


그 말에 누군가가 주먹을 불끈 쥐고 혀를 찼다.

“그때 이놈들이 몽땅 죽었으면, 우리가 여기 와서 이 개고생을 안 했을 텐데.”
“그러게 말이야. 에이, 퉤! 박고지에 침이라도 뱉어 넣을까?”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지만, 그 웃음에는 분한 한숨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박고지에 침을 뱉지 않았다. 그들은 말없이 서로의 등짐을 다시 둘러매고, 돌을 옮길 채비를 했다.


비가 내리는 해안의 오후, 쿠마모토성을 쌓는 일은 그렇게 묵묵히 이어졌다.




일을 마친 그들은 다시 나가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안상궁이 천 조각을 한 아름 안고 들어섰다.

“내일부터는 이 천 조각을 손에 꼭 감고 일하시게. 찬 바닷바람이 매서워 손이 트고 갈라지면 고생할 테니 말이야. 이미 상처 난 사람은 덧나지 않게 조심하고.”


안상궁의 말이 끝나자, 수현과 순이가 나가야 사람들에게 길게 자른 천을 나누어 주었다. 얼마 전 타케시가 성의 하인을 통해 보내온 무명천이었다. 그 천으로 겨울옷을 짓고, 남은 조각들을 모아 이렇게 나누어 쓰는 것이었다.

“히고의 절에는 나병 환자들이 순례자들과 함께 다닌다 하네. 병이 낫기를 빌며 불공을 드린다는데... 혹시 모르니 전염되지 않게 조심들 하게.”


안상궁의 목소리에는 옅은 불안이 배어 있었다.

2월의 늦은 오후, 나가야의 하늘은 잿빛으로 내려앉았다. 바닷바람은 더욱 차가워지고, 사람들은 빠듯한 살림을 이어가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수현과 순이는 부엌살림을 맡아, 언 배춧잎이나 싸구려 말린 생선이라도 구하려 저잣거리로 향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니, 기요마사가 새로 지은 절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절 앞에는 순례자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고, 그들의 발길마다 엎드린 걸인들이 손을 내밀려 동냥을 구걸하고 있었다.

줄 사이에는 누더기 천으로 온몸을 감싼 나병 환자들도 섞여 있었다. 그들이 순례자의 옷자락을 붙잡자, 병자를 부축하던 하인들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비켜! 비키라니까!”


그리고는 걸인들을 발로 걷어찼다. 걷어차인 한 걸인이 옆으로 픽 쓰러졌다. 힘이 빠진 몸이 바닥에 닿자 그대로 힘없이 고꾸라져 버렸다.

“아야야... 아이구,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낯익은 조선말이었다. 수현과 순이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 걸인은 누더기를 뒤집어쓴 채, 코마저 사라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순이는 그 앞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았다.

“...아버지?”


그녀는 무릎으로 기어가 걸인의 옷자락을 살며시 걷어 올렸다.
“아버지, 정말... 아버지예요? 어떻게 여기에...”


걸인의 짓무른 눈가에 눈물이 번졌다.
“순이냐... 정말 우리 순이냐...”


순이는 넝마 같은 아버지를 껴안았다. 그는 쉰 가래가 섞인 울음 속에서 힘겹게 말을 이었다.

“네 어미가 그렇게 죽고, 너는 생사도 몰라... 얼마나 찾아 헤맸는지 모른다. 그러다 부산항에 들이닥친 왜놈들에게 붙들려 이리로 끌려왔지. 그놈들 배에서 나병이 옮아, 같이 끌려온 이들이 하나둘 죽어 나갔다. 왜나라에 닿자마자 거리로 내팽개쳐졌는데... 이 절이 용하다는 말을 듣고 따라왔더니, 이렇게 네 얼굴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부처님의 가호란 게... 있긴 있나 보구나.”


순이는 거칠게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아버지, 저희 나가야로 가요.”

수현도 나직이 거들었다.
“함께 가셔요.”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뜨끈한 국물이 먹고 싶구나.”


수현이 서둘러 소바 한 그릇을 사 왔다. 그는 허겁지겁 몇 젓가락 삼키다가, 반쯤 남긴 그릇을 옆의 병인에게 내밀었다.
“저 이도 늘 남겨주거든.”

순이의 아버지는 그릇을 돌려주며 고개를 숙이고 나직이 속삭였다.
“너와 내가 사는 세상이... 다르다. 이렇게 살아 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그러나 순이는 등을 돌려 아버지를 업었다. 늙고 병든 몸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그녀의 걸음에는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나가야에 도착한 뒤, 순이는 아버지를 씻기고 방에 눕혔다. 따뜻한 밥상을 차려 왔지만, 아버지는 남은 몇 안 되는 손가락으로 이불을 움켜쥔 채, 벽을 향해 웅크려 누워 있었다. 결국 순이는 밥상을 그대로 둔 채 방을 나왔다.


다음 날 새벽,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나가야를 빠져나갔다. 순이는 사방으로 아버지를 찾아 헤맸지만, 그 후로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이전 04화4화- 타케시, 다이묘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