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안사 법당의 쪽마루에 앉은 수현은 고요히 서쪽 바다를 바라보았다.
‘저 바다 너머, 내가 떠나온 조선이 있겠지.’
그녀는 상상했다. 자신들이 타고 온 배보다 더 큰 배에, 나가야 사람들과 명이와 함께 몸만 가볍게 실은 채 조선으로 향하는 모습을. 히고의 산과 들을 뒤로하고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드는 사람들. 그 장면만으로도 수현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리 표정이 밝은 것이냐.”
명이가 다가와 곁에 앉았다.
교토에서 돌아온 뒤, 기요마사는 명이에게 묘안사로 거처를 옮기라 명했다. 명이는 별다른 말 없이 그 명을 따랐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협의가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으나, 명이가 선택한 일이라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조선으로 돌아가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수현은 눈길을 바다에 둔 채 말했다.
“이곳에선 서쪽 바다가 유난히 선명하게 보여요. 저 너머가 조선이지요?”
“그렇다.”
명이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주저하듯 입을 열었다.
“대왕마마께서 승하하셨다. 그리고 이제... 숙부께서 왕위에 오르셨다고 한다.”
수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임해군 마마께서는... 그럼...”
“이미 이 세상에 아니 계신다. 네 아버지 또한 내금위장으로서, 끝내 아버님과 운명을 함께하셨다고 들었다.”
그 말은 매섭게 수현의 가슴을 할퀴었다. 어깨가 무너져내리듯 온몸이 떨려왔다. 마지막으로 본 부모의 희미한 얼굴이 떠오르자, 더는 버티지 못하고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무릎에 고개를 묻은 채 흐느꼈다. 명이는 말없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수현은 붉어진 눈가를 닦았다. 그러나 그 눈빛에는 아직 흔들림이 남아 있었다.
“언젠가 바다를 건넌다 해도, 돌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이... 아버님이 돌아가신 일보다 더 서럽고 아픕니다.”
명이는 안쓰러운 눈길로 그녀의 손을 잠시 잡았다가 놓으며 바라보았다. 긴 침묵이 흘렀다. 바람이 바다 너머에서 불어와, 법당의 풍경을 흔들었다.
그는 오래 묻어 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어느 생일날이었지. 안국동 본가에서 또래 아이들과 처음 놀던 날이 있었다. 술래잡기를 하다 별당 뒤로 갔는데, 돌 위에 인형을 앉혀 두고 상냥한 어머니 흉내를 내던 네가 있었지. 너는 나를 보자마자 끌어다 앉히며 말했다.
‘아버지가 퇴청하셨구나, 이제 함께 밥을 먹자꾸나.’
그 말투가 어찌나 자연스러웠던지, 지금도 귀에 선하다.”
그는 잠시 미소를 지었다가 말을 이었다.
“너는 지저분한 인형을 내 품에 안겨 주며 말했다. ‘나리, 고생 많으셨지요. 제가 차린 밥상 드시고 아기에게도 먹여 주세요.’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너만 멀뚱히 바라봤어. 그랬더니 네가 타박하듯 말하더구나. ‘가시버시 놀이도 처음 하니? 아이와 놀아주고 밥상 차리느라 애쓴 부인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해야지.'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엉겁결에 대답했어.
‘부인, 수고 많았소.’
그러자 넌 방긋 웃더니 마당의 절구통에서 빗물을 떠다 주며 말했다.
‘약주도 한잔하세요’
그리고는 그걸 직접 내 입에 먹여 주기까지 했단다.”
수현은 ‘설마요?’하는 얼굴로 명이를 바라보았다.
“그날 밤 배탈이 나서 혼이 났지만.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놀이는 내게 너무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다.
“부산포구에서 너를 다시 보았을 때, 내금위가 함께 가라고 했을 때... 사실은 말렸어야 했다. 하지만 너와 함께라면, 이 두려운 길조차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비겁한 마음으로 널 데리고 왔지. 넌 몰랐겠지만.”
수현은 그를 바라보다 속삭이듯 말했다.
“세손 마마께서 계셔서... 저는 이곳도 견딜 만했습니다.”
명이는 그 눈길을 잠시 받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입술이 몇 번 달싹이다가, 마침내 결심한 듯 말했다.
“...출가하려 한다.”
그 말을 내뱉은 명이는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리고 수현은 그 말이 바위처럼 무겁게 굴러와 가슴을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떨림을 감추려 손등이 하얗게 될 만큼 두 손을 꼭 쥐었다.
명이의 목소리에도 미세한 떨림이 섞였다.
“나는 늘 군주의 허울에 매여 살았다. 나라를 떠나와도 따르는 이들이 있었고, 그들의 고통을 보며 나 또한 그 짐을 함께 짊어져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않되, 그 모든 것을 온전히 나 자신으로 받아들이며 살고 싶구나.”
바람이 스치고 침묵이 길게 흘렀다.
명이가 서쪽 바다 너머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너와의 가시버시 놀이는... 내 생의 가장 찬란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 기억을 입에 올리는 일이 자신에게 얼마나 잔혹한 일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 말을 들으며 수현은 끝내 자신의 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이제 막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그의 길에, 자신이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만을 몇 번이고 되뇌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