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는 이미 기울어 강둑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지천에 흩뿌려진 벚꽃잎이 살랑이는 바람에 눈처럼 흩날렸고, 강 아래에서는 벚꽃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잔물결처럼 번졌다.
재복이는 분홍빛 물결을 한참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왜놈들... 이 벚꽃처럼, 너희들의 세상도 한순간일 뿐이야.”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벚꽃은 그저 아름다웠다. 사람들의 웃음은 따뜻했고, 그 웃음소리를 듣는 사이 조선에 두고 온 가족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움과 허기가 뒤섞여 가슴 한켠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는 벚꽃 가지를 하나 꺾어 줄기를 입에 문 채 길을 걸었다. 씁쓸한 맛이 혀끝에 오래 남았다.
그때, 강가의 주택가 쪽에서 갑작스러운 소란이 일었다.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비명과 함께 기모노가 풀어진 여자가 허둥지둥 달려와 재복이의 뒤로 몸을 숨겼다. 재복이는 놀라 한 걸음 물러섰지만, 여자는 그의 그림자에 파고들 듯 등을 바짝 붙였다. 잠시 뒤, 거친 숨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네놈이 이 여자의 새서방이냐?”
재복이는 얼어붙은 얼굴로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자는 더욱 깊숙이 그의 뒤로 몸을 숨겼고, 사내의 눈빛이 번뜩였다. 사내는 재복이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며 이를 갈았다.
“이 년이 이렇게 달라붙는 걸 보니, 네 놈이 새서방이 틀림없구나.”
사내는 이를 악문 채 재복이를 내던지듯 밀쳤다.
“내일 오후, 이 강가로 나와라. 결투다. 나는 타치바나 번의 무사, 호소카와다. 네놈은 어느 번 놈이냐?”
재복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입술이 떨렸다.
“저... 나가야에 살고 있습니다.”
사내는 코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내일 나오지 않으면, 나가야에 사는 놈들 중 살아남을 자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는 여자를 한 번 노려본 뒤, 왔던 길로 거칠게 돌아섰다. 재복이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여자는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사색이 된 재복은 간신히 나가야로 돌아왔다. 우물가 평상에 털썩 앉자, 물을 뜨던 칠곡이가 다가와 물었다.
“오다가 귀신이라도 본 거냐? 왜 이렇게 넋이 나갔어?”
재복이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간신히 목소리를 짜냈다.
“귀신한테 홀렸나 봐... 어쩌지?”
그 소리에 나가야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안상궁과 수현도 곧 그들 곁에 섰다. 안상궁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정말 처음 보는 여자였느냐?”
재복의 턱이 떨리더니, 이가 딱딱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맹세코 처음 본 여자입니다. 갑자기 제 뒤로 숨어들더니... 그만 이 사달이 났습니다.”
수현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물었다.
“그 사무라이는 누구예요?”
“그 여자의 애인 같습디다. 여자는 과부라 했고, 그자가 강제로... 추행했다고는 했는데, 사실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납니다.”
안상궁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손 마마도 안 계신데 이런 일이 터지다니... 재복이는 칼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도공인데. 이 일을 어쩐단 말이냐.”
수현은 잠시 고개를 숙이다가 숨을 깊이 들이켰다. 눈빛 속에 작은 불꽃이 일었다.
“제가 대신 나가겠습니다.”
순간 그 자리에 정적이 흘렀다. 안상궁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수현이, 네가?”
수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세손 마마께서 틈틈이 검도를 가르쳐 주셨어요. 목검만 잡아봤지만, 칼의 기본은 비슷합니다. 재복 아재를 대신할 사람은 나가야에서 저뿐일 것 같습니다.”
대장간의 억쇠할아범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게 숨겨둔 검이 있다. 네가 진심으로 나가겠다면 따라오거라.”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힘이 실려 있었다.
대장간 안에서는 불길이 혀처럼 타올랐다. 억쇠할아범은 구석 다다미 밑에 숨겨두었던 가늘고 긴 검을 꺼냈다. 철의 냄새가 공기 속에 번졌다.
“검을 잡아 보거라. 자세를 봐주마.”
수현은 검을 두 손으로 단단히 쥐었다. 억쇠할아범은 그녀의 손 위치와 발의 균형을 하나하나 살폈다. 손잡이를 손에 맞게 갈아주고, 허리와 호흡을 바로잡았다.
“허리를 세워라. 팔의 힘을 빼고, 숨은 고르게.”
그의 목소리는 낮고 엄숙했다.
달빛 아래에서 수현은 검을 휘둘렀다. 칼끝이 달빛을 가르며 은빛 호선을 그리자, 그 움직임은 어딘가 검무를 닮아 있었다.
억쇠할아범은 불을 지펴 칼을 몇 번이고 달구었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결의와 두려움 또한 함께 벼려졌다. 장작 타는 소리와 쇠가 달궈지는 소리, 칼이 허공을 가르는 숨소리만이 긴 밤을 채웠다. 그렇게 수현은 결투에 대한 두려움을 서서히 눌러갔다.
다음 날, 해가 저물 무렵 붉은 노을이 강가를 덮을 때 재복과 수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둑 너머 나무 뒤에는 어제의 그 과부가 몸을 숨긴 채 재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복은 그녀의 시선을 느끼자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강가에는 사내들이 무리를 지어 서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꽂혔다. 어제 결투를 약속했던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타치바나의 무사, 호소카와 유지다. 네가 대리인이냐?”
수현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바닥은 이미 땀에 젖어 있었다.
‘세손 마마만 곁에 있었다면...’
처음으로 명이 없이 세상과 홀로 맞서는 듯한 두려움이 그녀의 목을 조여 왔다.
호소카와는 칼을 뽑아 들었다. 여유로운 눈빛에 날렵한 몸놀림, 흠잡을 데 없는 움직임이었다. 옆에 선 사내가 크게 외쳤다.
“규칙은 단 하나! 먼저 쓰러지는 자가 진다!”
두 사람의 검이 맞부딪혔다. 쇳소리가 공기를 찢었다. 호소카와의 검은 춤추듯 가벼웠고, 수현의 검은 둔하지만 그 안에는 단단한 힘이 서려 있었다. 벚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며 얼굴을 스쳤다. 수현은 상대의 검자루를 눌러 칼을 받아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명이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성급한 자는 허점을 드러낸다. 물러서며 힘을 모았다가, 단 한 번- 모든 것을 걸어 내려쳐라.’
수현은 짧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숨을 고르고 검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상대의 오른쪽 어깨를 향해 달려들었다.
“맵!”-
기합과 함께 검이 번개처럼 휘둘러졌다.
쇳소리가 울리고, 금속이 어깨뼈에 부딪히는 둔한 소리가 터졌다. 호소카와의 무릎이 꺾이며 그가 쓰러졌다. 손에서 검이 튀어 나가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동시에 수현의 옷깃 아래로 붉은 피가 번지기 시작했다. 가슴에서 배까지,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그녀는 검을 짚고 버티려 했지만, 끝내 무릎이 꺾이며 천천히 무너졌다. 놀란 재복이 달려와 그녀를 받아 안았다.
그 순간,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왔다. 흙먼지가 일며 말을 탄 한 그림자가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은 타케시처럼 보이기도 했고, 명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점점 어두워지는 시야 속에서 수현은 그 얼굴을 끝내 확인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수현의 시야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금박으로 장식된 미닫이문과 병풍의 문양이 어른거렸다. 황금빛으로 덮인 듯한 방안을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는 사이, 조용히 문이 열렸다.
문이 소리 없이 미끄러지듯 열리더니 순이가 들어왔다. 그녀는 조심스레 상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문을 닫았다. 그리고 수현의 곁으로 다가왔다. 수현은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배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눈으로만 그녀를 쫓았다.
순이는 안도한 듯 희미하게 웃었다.
“깨어나셨군요... 아씨. 정말 죽을 뻔하셨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남만의 의원이 오셔서 금속 바늘로 상처를 꿰매셨습니다. 남쪽 바다에서 온 이국인이라 하더군요. 포르투갈에서 왔다던데, 손놀림이 참 신기했습니다. 제가 옆에서 의원님을 거들며 지켜봤어요. 약재를 덧입히고 천으로 단단히 감아 두었으니, 한동안은 절대 몸을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수현은 놀라 손을 배로 가져갔다. 단단히 감긴 천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여긴... 어디지? 넌 또 어떻게 여기에...”
“구마모토성의 별관, 작은 성입니다. 타케시 도련님의 거처예요. 아씨의 상처가 깊다고, 기요마사님께서 직접 의원을 불러 주셨습니다.”
수현은 힘겹게 물을 청해 입술을 축였다. 그리고 다시 순이를 바라보았다.
“넌... 잘 지내고 있니?”
순이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아씨, 지금은 제 걱정하실 때가 아니에요. 자칫했으면 정말 세손 마마 뵐 면목이 없을 뻔했어요. 왜 그렇게 무모하셨어요...”
수현은 힘없는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네 이야기를 좀 들려다오.”
순이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고개를 들어 곱게 웃었다.
“세손 마마께서 절 데려간 곳은 히고에서 가장 이름난 게이샤들이 모인 오키야였어요. 그곳의 오카미는 어머니가 조선인이라고 했지요. 세손 마마께 큰 은혜를 입었다고 하셨어요.
지금은 그곳에서 마이고로 지내며 춤과 노래를 배우고 있습니다. 오카미는 절 ‘하나’라고 부르세요. 가끔 연회에 기요마사님이나 타케시님이 오시면... 불려가기도 합니다.”
수현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힘겹게 다시 떴다.
“가끔 보내준 돈은 받았지만... 안상궁 마마께서 네 처지도 모른 채 보내온 돈을 쓸 수가 없다고 하셨어.”
그 말을 들은 순이의 얼굴에 쓸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세손 마마 덕분에 몸을 팔진 않았습니다. 게이샤는 몸이 아니라 예기를 팔아 돈을 받는 거니까요. 그 돈은... 더럽지 않아요.”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덧붙였다.
“그러니 부디, 나가야 사람들과 세손 마마를 위해 써 주세요.”
순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낮은 목소리로 속내를 털어놓았다.
“아버지가 사라지신 그날, 전 야마토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게이샤로 살며 정치가와 무사, 상인들을 지켜보면서 알게 됐어요.
그들은 모두 자기 잇속만 챙기는 사람들이었어요. 조선인뿐 아니라, 같은 야마토 사람들까지도 가난한 자는 천하게 다루더군요.”
순이의 시선이 멀어졌다.
“게이샤 중엔 부모에게 팔려 온 아이들이 많아요. 매달 그 부모들이 찾아와 돈을 받아갑니다. 그 아이들은 오히려 저를 부러워하지요. 돈을 뜯어 갈 가족이 없다는 이유로요.”
순이는 살며시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금세 사라졌다.
“그 애들은... 야마토의 가난 자체에 복수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수현은 힘없는 팔을 들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손끝이 맞닿자, 서로의 온기가 상처 위를 덮듯 번져 갔다.
그때, 미닫이가 스르르 열렸다. 조용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타케시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순이는 그를 보자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말없이 물러났다.
“죽은 먹어도 된다고 하더군. 내가 떠먹여 줄게.”
타케시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수현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물... 물을 좀 주세요.”
그녀는 물을 받아 입술을 적시며 미약한 숨결로 속삭였다.
“고마워요. 살려주셔서.”
타케시는 잠시 웃음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우린 은혜든 원수든 반드시 갚는 사람들이야. 의원도 아버지가 불러주신 거다. 뵙게 되면 감사 인사, 잊지 마.”
수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타케시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도, 나가야 사람들도 이제 아버지의 백성이야. 내가 다이묘가 되면 내 백성이 되는 거고. 감당 못 할 일이 있으면 성에 와서 말해.”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지금 야마토는 사무라이가 곧 법이다. 길을 걷다 칼에 맞아 죽는 자들이 적지 않지. 나가야에서 아직 그런 일이 없는 건 기적이 아니라, 그곳이 아버지가 지은 마을이기 때문이야. 게다가 내가 자주 드나드니, 번의 무사들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거고.”
수현의 눈앞에 지난 기억과 함께 주변의 수군거림이 겹쳐 떠올랐다. 히고의 사무라이들- 잔혹하고 거칠기로 소문난 남부의 무인들. 도요토미 히데요시조차 그들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해 전국 통일이 늦어졌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들에겐 법보다 칼이, 명분보다 복수가 가까웠다. 지금도 열도의 남쪽 어딘가에서는 해적질의 피비린내가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 타케시가 불쑥 물었다.
“명이는 곧 출가해 승려가 된다지?”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한동안 천장을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내려 수현을 똑바로 보았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용기를 내는 듯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내 측실이 되면 어떨까?”
공기가 멎은 듯 방 안이 고요해졌다.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라곤 없었다. 평소의 거침없는 언행과 달리, 놀라울 만큼 진지했다.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혔다. 네가 죽을 수도 있다고 했을 때... 여기가 막 따끔거리고, 숨이 막혔어.”
그는 가슴께를 손으로 문지르며 씁쓸히 웃었다.
“아버지께 숨이 안 쉬어진다고 했더니, 한심한 놈이라며 발로 내 가슴을 힘껏 차셨어. 순간 숨이 멎었다가, 겨우 숨을 고르자 아버지가 그러시더군.
‘멍청한 놈! 넌 사랑에 빠진 거다.’ 그때 알았어. 아무래도... 나, 널 여자로 좋아하는 것 같아.”
타케시는 얼굴이 붉어지자 창을 활짝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밀려와 병풍을 흔들었다. 얼마간 숨을 고르던 그는 다시 창을 닫고, 낮게 중얼거렸다.
“정실로 맞고 싶지만, 내 정실은 이미 도쿠가와 집안의 딸로 정해져 있어. 그리고 네가 명이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도 알아. 그 녀석도 널 좋아하지. 하지만 그는 스스로 중이 되겠다고 했지. 그러니... 지금은 나만 네 곁에 설 수 있어.”
그는 마지막 말을 끝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닫히며 바람이 스쳤다. 남은 것은 차가운 공기와, 수현의 떨리는 숨결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