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기로에서

by 릿다


얼마 후, 수현은 나가야로 돌아와 몸조리를 했다. 그즈음 성안은 타케시의 혼례 준비로 분주했다. 혼례 날, 나가야 사람들 몇몇이 초대받았으나 명이는 교토에서 수행 중이라 오지 못했다. 그들은 성의 나무 그늘 아래 몸을 낮추고, 멀찍이서 혼례를 바라보았다.


성안은 히고의 가신들과 귀족, 상인들, 그리고 도쿠가와 측에서 온 손님들로 붐볐다. 식이 거행되는 동안, 마당에는 가신들이 무릎을 꿇은 채 엄숙하게 의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신부는 눈부신 흰 기모노를 입고, 머리 위에는 순종을 상징하는 흰 츠노카쿠시를 얹고 있었다. 얼굴에는 하얀 분이 두껍게 발려 있었고, 입술은 앵두알처럼 작고 붉게 찍혀 있었다.

작은 인형 같기도 했으나, 고요한 미소 속에는 천진함과 함께 서늘한 기운이 스며 있었다. 그 옆에서 타케시는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하인이 따라주는 술잔을 묵묵히 들이켰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수현의 가슴에는 어린 시절 가시버시 놀이를 하던 기억이 겹쳐졌다. 명이가 인형을 안고 어설프게 웃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득한 기억들이 바람처럼 스치며, 수현의 마음을 흔들었다.

“신부 얼굴을 너무 허옇게 분칠을 해서, 나는 좀 무섭네그려.”
칠곡 아재가 낮게 말했다.
“야마토는 얼굴이 희어야 미인이라 하잖아. 우리 연이처럼.”
돌이 아범이 웃으며 덧붙였다.


혼례식이 끝나자, 남자들은 젠(膳)을 하나씩 받았고 여자들은 소쿠리에 음식을 챙겨 돌아갈 채비를 했다. 수현이 대문을 나서려는 순간, 하인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기요마사님께서 아씨를 찾으십니다.”

수현은 처음으로 구마모토성 본관에 발을 들였다. 어둑한 복도를 지나, 길게 이어진 나무 계단을 올랐다. 한 방문 앞에 이르자 걸음을 멈췄다. 문이 미끄러지듯 열리며, 생각보다 소박한 방이 드러났다.


금박 병풍 앞에 기요마사가 앉아 있었다. 방 안에는 장식이라곤 도코노마에 걸린 족자 하나뿐이었다. 장검조차 보이지 않았다.

수현이 무릎을 꿇자 하인이 차를 내왔다. 기요마사는 찻잔을 가볍게 들어 보이며 그녀에게도 권했다. 수현은 잔을 들었으나, 선뜻 입에 대지 못했다.

잠시 후, 기요마사가 입을 열었다.
“저 족자의 글씨가 누구의 것인지 아느냐?”

수현이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레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기요마사의 입꼬리가 옅게 올라갔다.
“명이는 단번에 알아보더군. 저 글은 이순신의 필체다. 칠언시로 충과 효를 노래한 것이다. 수려한 글씨이면서도 무장의 기운이 서려 있지 않는냐. 비록 적이었으나, 재능만은 부러웠던 장수였지.”


그는 잠시 족자를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나는 조선 출병의 선봉장으로 그와 늘 쫓고 쫓기는 싸움을 했다. 때로는 나의 병사들이 그를 사지로 몰았고, 때로는 그의 병사들이 나를 죽음으로 몰아붙였지. 그러나 이순신은 단 한 번도 임금에게 보이기 위한 전쟁을 하지 않았다. 언제나 백성을 위해 검을 들었다.”

기요마사는 말을 잠시 멈췄다.

“그런 그를 조선의 왕은 충신이 아니라 역적으로 보았다. 전쟁이 가장 치열하던 때에 그를 옥에 가두었으니... 참으로 웃지 못할 일이지 않느냐.”

기요마사의 시선이 수현에게로 향했다.
“명이도 그러하다. 백성을 품을 기질을 타고났으나, 시대를 잘못 만난 것이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머지않아... 도쿠가와의 시대가 올 것이다. 나는 히데요리님을 위해 간사이의 군세를 규합하고 있으나, 흐르는 역사의 물줄기는 거스를 수 없을 것 같구나. 나는 도쿠가와의 사위라 하나, 그들의 가신들은 여전히 나의 충심을 의심하고 있다.”


기요마사의 눈빛이 깊은 음영을 띠었다.
“아직 내게 힘이 있을 때, 명이는 반드시 제 자리를 찾아야 한다. 그것이 히고를 위하고, 곧 명이 자신을 위한 일이 될 것이다.”

수현은 손을 맞잡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희도... 세손 마마께 힘을 보태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기요마사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명이는 정치의 기술을 익혀야 한다. 너는 그가 망설임 없이 승려의 길을 걷도록 도와야 한다. 야마토의 정치는 불심과 학문이 깊은 승려들이 다이묘들과 함께 이끌어 왔다.”

수현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말씀은...”


기요마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명이는 백성들의 신망을 받는 승려가 되어야 한다. 너희 모두가 그를 도와야 한다. 그것이 이 적국에서 너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하고도 든든한 발판이 될 것이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납덩이처럼 가슴에 내려앉았다.


기요마사의 방을 나선 수현은 난간을 움켜쥔 채 한동안 서 있었따. 숨이 가빠 쉽게 몸을 떼지 못했다. 얼마 후에야 꺾인 돌계단을 따라 천천히 내려왔다.

성문을 나서자, 안상궁이 서 있었다. 수현은 다가가 그녀의 품에 몸을 맡겼다. 처음으로 누군가의 품에서 위로받고 싶었다. 그리고 그 품 안에서, 자신이 바라는 길과는 다른 운명이 이미 앞에 놓여 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성에서 무슨 말을 들었기에 이러는 게냐?”

안상궁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불안이 함께 묻어 있었다.

수현은 대답하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말없이, 소리 없이 그저 흘러내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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