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떠나 보내기

by 릿다


“실례합니다.”
낯선 여인의 목소리에 바느질하던 수현과 안상궁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은 황급히 바늘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왔다. 기모노를 단정히 차려입은 젊은 여인이 어린 딸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뒤에는 쌀가마를 진 하인이 한 명 서 있었다.

여인은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저 때문에 황망한 일을 겪으셨지요. 감히 은혜에 미치진 못하지만, 작은 성의를 전하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하인에게 쌀가마를 내려놓게 한 뒤, 먼저 돌아가라 일렀다. 다시 고개를 숙이는 동작에는 꾸밈없는 진심이 배어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안상궁이 수현에게 말했다.

“재복이를 불러오너라.”


수현이 가마터 쪽으로 발길을 옮기려는 순간, 진흙 묻은 손으로 재복이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여인을 알아보는 순간,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몸을 돌렸다.
“재복이, 자네를 만나러 온 것 같네.”


안상궁의 말에 재복이는 걸음을 멈추고, 머뭇거리며 평상 끝에 조심스레 앉았다.

여인은 어린 딸의 손을 꼭 잡고 재복이 앞으로 다가섰다.
“미카짱, 이분이 오카상, 그러니까 어머니를 구해주신 분이야. 인사드리렴.”


작은 아이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복이는 고개를 저으며 낮게 말했다.
“내가 아니라, 저분이 검을 들었소.”


그는 수현을 가리켰다.

여인은 놀란 듯 수현을 바라보았다. 햇빛 아래, 수현은 말없이 서 있었다.
“그때 그 대리인이 여인이었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저는 용기도 없어 남에게 기대기만 했으니 부끄럽네요.”


그녀는 품에서 보따리를 꺼내 재복이에게 내밀었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유카타를 한 벌 지었습니다. 부족하지만 받아주십시오.”


재복이는 벌떡 일어나 손사래를 쳤다.
“내가 아니라 수현 아씨라니까요! 왜 자꾸 나한테 이러십니까!”

그 말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묵직한 쌀가마는 나가야의 살림으로 들어와 따뜻한 기운을 번지게 했다.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하는 야마토 여인의 모습은, 하루하루를 버텨 살아가는 이들에게 묘한 자긍심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이 웃자 재복이는 얼굴을 붉히며 울상이 되어 도공 공방 쪽으로 달아났다. 안상궁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못난 사람...”


안상궁은 여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좀 당황했나 봅니다. 제가 전해드릴 테니 두고 가세요. 쌀은 감사의 표시라 하시니... 고맙게 받겠습니다.”

여인은 다시 고개를 깊이 숙였다.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는 스즈키 사츠코입니다. 그날의 그이는 호소카와 유지라고, 성주님의 허락을 받고 이혼한 전 남편입니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이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찾아와 저를 괴롭혔습니다. 본가로 돌아오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도 했지요. 그날은 제 옷을 찢고, 끝내 검까지 빼들었습니다. 죽을 것 같아 정신없이 달아나다가 그만...”


사츠코는 숨을 고르듯 말을 멈췄다.

“다행히 그 일 이후 그는 번에서 쫓겨나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목숨을 걸고 저를 지켜주신 그 은혜를, 두고두고 잊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인사를 한 뒤 돌아섰다.


그 뒤로 사츠코는 자주 나가야를 찾았다. 처음에는 자신이 쓸 그릇을 사 갔지만, 차츰 이웃들의 물건까지 주문해 주었고, 농기구인 서래와 쟁기도 대장간의 억쇠할아범에게 부탁했다. 올 때마다 재복이의 안부를 묻고 형편을 살폈다.

처음에는 재복이도 불편해했으나, 사츠코의 다정한 성품과 잔잔한 배려가 마냥 싫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무거우니... 제가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이제는 재복이가 먼저 나서 그녀의 집까지 물건을 날랐고, 돌아올 때면 사츠코가 싸 준 음식을 받아왔다.


성에서도 쉽게 맛보기 어려운 귀한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는 저녁이면, 산초 향이 스민 야마토 음식이 코끝에 낯설게 스쳤다.

기름에 튀긴 채소는 맛이 좋아 서로 손을 뻗어 앞다투어 집어 먹었고, 단맛이 강한 콩조림은 짠맛에 익숙한 입맛엔 낯설어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꿀꺽 삼켜졌다.

그런 날에는 말보다 웃음이 많았다. 음식과 웃음 속에서, 서로 다른 땅의 사람들이 조금은 가까워진 듯했다.




한편, 명이는 교토의 법안사에서 승려 수련을 마친 뒤 계를 받았다. 법명은 일연(一蓮)이었다. 계를 받은 뒤에도 불법을 깊이 배우기 위해 법성사에 남아 수행에 전념했지만, 때로는 히고의 묘안사로 내려오곤 했다.

교토에서 이어진 행렬 속에서 일연의 가마가 성곽 마을로 들어설 때면, 사람들은 일제히 엎드려 머리를 숙였다.


야마토의 백성들 역시 조선의 백성들처럼 삶이 고단했다. 종교를 가질 여유조차 없었지만, 승려는 학문과 덕망을 겸한 존재였기에 그들은 자연스레 고개를 숙였다.


그날, 일연이 묘안사에 머문다는 소식을 들은 수현은 서둘러 절로 향했다.

법당 마당 가득 염불 소리가 맑고 청아하게 번져나갔다. 수현은 부처님 전에 예를 올린 뒤 예불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법당 쪽마루에 앉았다. 서쪽 바다 위로 떨어지는 햇살이 은빛 물결을 만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뒤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를 깎고 법복을 입은 명- 아니, 일연스님이 서 있었다. 낯선 모습이었으나, 그 낯설음 속에는 세속을 벗어난 고귀한 빛이 스며 있었다.

일연은 다기를 들고 다가와 수현 앞에 찻잔을 놓았다. 마차(抹茶)의 쌉싸래한 향이 입안에 퍼져 나갔다. 수현은 그 맛이 자신의 삶과도 같다고 느꼈다. 쓰지만, 결국 담담히 삼켜야 하는 맛이었다.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수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희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세손... 아니, 일연 스님께서도 편안하신지요.”

일연스님, 명이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 애쓰고 있지만... 아직은 쉽지 않구나. 그보다, 큰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몸은 괜찮으냐?”


수현은 마지못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비 오는 날이면 상처가 쑤시긴 하지만 괜찮습니다. 요즘은 사츠코라는 분이 저희 물건을 많이 사 주셔서 나가야 살림도 한결 수월해졌어요.
그리고 성에서 배당된 도자기만 납품하면, 나머지는 저희가 직접 팔 수 있게 되었어요. 이 모든 것이 스님께서 성주님께 말씀해 주신 덕이라, 다들 무척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말을 잇다 보니 어느새 이야기들이 뒤섞여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재복이와 사츠코의 일, 연이의 재롱까지. 급하지도, 꼭 전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들. 그런데도 멈출 수 없었다.

일연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 나직이 말을 건넸다.
“수현아, 네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구나. 이제 말해보아라.”

수현의 입술이 굳은 듯 닫혔다. 그녀는 찻잔을 살며시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오랜만에 뵈니... 그저 반가워서 말이 많아졌나 봅니다.”


그녀는 인사를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서려던 순간, 일연의 낮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얼마 전 교토 법성사에서 서찰을 받았다. 타케시가 보낸 것이었다. 히고번의 무사와 결투를 벌이다 네가 크게 다쳤다 하더구나.

그리고... 너를 측실로 맞이하겠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수현의 발걸음이 멈췄다.

법당 안은 정적에 잠겼다. 숨결과 심장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를 가르고 흘렀다.

“네 안위가 염려되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마음이 놓였다.”

명이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다.


수현은 천천히 돌아섰다.
“정말... 안심하셨습니까?”

“그렇다.”
귀를 기울여야 들릴 만큼 낮은 음성이었다.


말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수현은 아무 말 없이 법당을 나섰다. 문살 사이로 스며든 바람이 마차(抹茶) 향을 밀어내며 법당 안을 훑고 지나갔다. 일연은 제자리에 앉은 채, 바다 너머 반짝이는 은빛 파도를 오래 바라보았다.


절을 나온 수현은 나가야로 돌아가지 않았다. 발걸음이 향한 곳은 순이가 있는 오키야였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하인의 말에 순이는 황급히 대문 밖으로 뛰어나왔다.


나무 그늘 아래,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있는 수현이 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말을 잃고 있었다. 순이는 조용히 다가가 수현의 손을 잡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일으켜 자기 방으로 데려갔다.

그날 밤, 순이는 연회장의 손님방에 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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