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 수현은 타케시의 측실이 되어 쿠마모토성으로 들어갔다. 조선인이었던 그녀는 기요마사의 가신 아이다의 양녀로 입적되었고, 그 이름 아래 혼례를 올렸다.
아키는 어린 연이를 안상궁에게 맡기고 날마다 성으로 올라왔다. 낯선 성 안 생활에 서툰 수현을 돕기 위해, 안상궁이 따로 부탁한 일이었다. 수현은 아키에게 단단히 일러 두었다.
“성 안에서 본 일은 나가야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아요.”
그날도 아키는 부엌 한쪽에서 하녀들의 눈을 피해 오니기리 몇 개를 만들었다. 보자기 안에는 아직 식지 않은 밥냄새가 남아 있었다. 하녀들이 힐끔거리며 수군거렸지만, 아키는 아랑곳하지 않고 수현의 방으로 향했다.
그때, 타케시의 어머니 사키의 방에서 날 선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개가 밥을 먹듯 고개를 쳐박고 먹다니... 천한 것은 어쩔 수 없구나.”
주변의 부인들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킥킥거렸다.
성 안의 정실과 측실들은 매일 사키의 방에 모여 식사를 했다. 야마토의 예법에 익숙지 않은 수현은 사키의 잔소리와 비아냥의 표적이 되었다. 그러나 수현은 그 말들을 모른 체했다, 아니, 모르는 척했다. 표정 하나 흔들리지 않은 얼굴에는 오히려 고요한 결심이 배어 있었다.
야마토의 밥상은 조선의 상보다 훨씬 낮았다. 그릇을 손에 들지 않으면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참 이상한 풍습이야. 왜 이렇게 상이 낮을까?’
속으로 중얼거리며, 수현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밥그릇을 들어 밥알을 세듯 천천히 씹었다. 그 움직임은 느리고 단정했다.
“왜 채소만 먹어대는 거냐. 생선은 꼭 챙겨 먹어야 하는 법이다. 음식에 담긴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히 먹거라. 이런 것도 일일이 말해줘야 하느냐?”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는 교묘한 조롱이 깔려있었다. 여인들이 다시 한 번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방 안을 떠다니는 얄미운 바람처럼, 수현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수현은 천천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제가 요즘 쿠마모토성의 안녕을 빌며 불공을 드리고 있습니다. 저의 불심이 어머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듯하여 송구합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그 순간, 여인들의 손끝에 걸린 생선 꼬리며 젓가락 위의 토막이 허공에서 멈췄다. 사키 역시 젓가락을 쥔 손을 그대로 멈춘 채였다.
사키는 눈살을 찌푸리고 수현을 노려보았다. 남편이 어째서 저 보잘것없는 여자를 타케시의 측실로 들였는지, 그 속내를 가늠할 수 없었다. 겉으로는 우아하게 음식을 씹고 있었으나, 마음속에서는 의심이 끈질긴 생선가시처럼 박혀 쉽게 빠지지 않았다.
수현은 늘 평온한 얼굴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편한 날이 없었다. 하루 중 가장 괴로운 시간은 여자들이 모이는 식사 자리였다. 험담과 비아냥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아무 의미 없는 말들이 끊임없이 오가는 순간들이었다.
사키가 무슨 말을 하든 여인들은 호들갑스레 맞장구를 쳤고, 뜻 모를 농에도 과장된 웃음이 피어올랐다. 웃음이 잦아들면, 곧바로 아첨이 그 자리를 메웠다.
그렇게 가식으로 가득 찬 식사가 끝나자, 수현은 조심스레 자리를 벗어나 마루로 나왔다. 반질거리는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기모노는 걷기에도 불편했고, 입는 일은 더 그러했다. 아키가 없으면 혼자서는 옷을 제대로 갖춰 입을 수도 없었다.
허리에 감은 오비는 무겁기만 해서,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몸이 뒤로 쏠리 듯 휘청거렸다. 결국 발끝을 모아 아장거리듯 걸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방 앞에 다다르자, 수현은 긴 하루를 버텨낸 사람처럼 작게 숨을 고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힘들었지요?”
문 앞에서 기다리던 아키가 일어나 그녀를 맞았다. 그 순간 수현은, 이 성 안에서 아키의 존재가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새삼 깨달았다. 이 사자우리 같은 성 안에서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이가 있다는 것- 그것은 곧 숨 쉴 수 있는 자리가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이거 드셔보세요. 방금 부엌에서 만들어 왔어요.”
아키가 내민 보자기 안에는 아직 따뜻한 오니기리가 몇 개 들어 있었다. 수현은 그것을 두 손으로 꼭 감싸 쥔 채 한참을 앉아 있다가, 조심스레 한 입 베어 물었다.
“마님은 오니(鬼) 같아요. 아씨뿐 아니라 성 안 사람들을 모두 들들 볶잖아요. 그러니 그런 말들,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아키의 말에 수현은 오니기리를 삼키며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아키. 이제야 밥을 먹은 것 같아요.”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다 동시에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그 짧은 순간, 성 안에 늘 깔려 있던 긴장이 잠시 느슨해졌다. 방 안의 공기도 그때만큼은 따뜻해진 듯했다.
심술궂은 겨울이 가고, 창문 너머에서 벚꽃잎이 바람을 타고 방 안으로 흘러들었다. 쿠마모토성에는 유난히 벚꽃이 많았다. 성의 여주인 사키가 벚꽃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들 했다.
벚꽃이 만개한 삼월 중순, 봄바람은 아직 쌀쌀했으나 성 안은 화사했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이른 아침부터 들뜬 기색이 감돌았다.
사키의 명으로 하인들이 분주히 벚꽃놀이를 준비했고, 게이샤들도 불려와 춤과 노래로 흥을 돋우고 있었다. 아키에게서 순이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수현은 서둘러 단장을 마치고 연회장으로 향했다.
시어머니 사키는 이미 윗자리에 앉아 있었다. 주변의 측실들과 귀족 부인들은 차례로 선물을 내놓으며 그녀의 기분을 살폈다. 사키는 벌써 술기운이 오른 듯, 웃음을 머금은 채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수현은 공손히 인사를 올린 뒤, 그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자리 한켠에 앉았다.
그때, 순이가 무대 앞으로 나와 샤미센을 켰다.
챙챙챙- 챙챙챙-
일정한 음이 심장박동처럼 연회장에 울렸다. 조선의 음색과는 전혀 다른, 묘하게 낯선 리듬이었다. 수현은 그 이질감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순이의 연주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음률 뒤에는, 저 소리를 완성하기 위해 그녀가 지새웠을 수많은 밤과 노력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듯했다. 수현의 가슴에는 설명할 수 없는 아릿한 감정이 번져왔다.
그때 생각에 잠겨 있던 수현의 곁으로 늦게 도착한 타케시의 정실 미유키가 다가왔다.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여기 앉아야겠어요. 방석을 이쪽으로 가져다 놓거라.”
수현은 고개를 숙여 먼저 인사했다. 미유키는 눈웃음을 지으며 우아하게 자리에 앉았다. 하녀가 내온 젠(膳)에서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미소를 머금은 채 낮게 중얼거렸다.
“저 게이샤도 그대와 같은 조선인이라지요. 나는 외인(外人)들이 정말 싫어요.”
그녀는 꽃 같은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시어머니 사키에게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고는 다시 사뿐히 앉았다.
“모두 싸그리 잡아들여 다 죽여버렸으면 좋겠어요. 호호호.”
잔혹한 말이 맑고 고운 웃음과 함께 흘러나왔다. ‘죽여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은 봄바람처럼 가볍게 흩어졌다.
잠시 뒤, 미유키는 설탕에 절인 과일을 집어 들다가 시어머니 사키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수줍음을 타는 아이처럼 볼을 붉히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그대로 지닌 채, 귀족 부인들에게 머물던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수현에로 옮겨왔다. 입술이 거의 움직이지 않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이만 낳지 마요. 그러면 요절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남자들의 마음은 늘 봄바람 같잖아요. 지금이야 타케시 님이 그대를 애지중지하지만, 그게 얼마나 가겠어요?
할아버님을 봐도, 오라버니들을 봐도... 남자들 변덕은 정말 못 말린다니까요. 호호호.”
미유키는 손끝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 웃음은 향기로운 독처럼 공기 속에 퍼져 나갔다. 수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찻잔을 들어 천천히 한 모금 마신 뒤, 무대 위의 순이를 바라보았다. 순이는 샤미센을 멈추지 않은 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수현을 보고 있었다. 수현은 그 시선을 받아, 화사한 미소로 응답했다.
그리고 잔을 내려놓으며 미유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타케시 님께... 미유키님이 그리워하고 계신다고 전해 드릴게요. 오늘 밤에요.”
순간, 미유키의 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깨질 듯 움켜쥔 손등이 하얗게 떨리며 잔이 가늘게 흔들렸다. 그러나 얼굴에는 여전히 천진한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그 눈길은 화사한 벚꽃 사이를 잠시 헤매다, 이내 사키에게로 돌아갔고, 입가에는 다시 해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수현이 타케시와 혼례를 올린 뒤, 기요마사는 명이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법성사와 혼코쿠지에 각각 쌀 오십 석과 조선 도공이 만든 다완(茶碗), 그리고 비단 천 필을 공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히고 땅에 새로 절을 세웠다. 묘안사 곁에 ‘탄생사(誕生寺)’라 이름 붙인 절이었다. 일연 스님이 된 명이는 묘안사와 탄생사의 주지를 겸했고, 이듬해에는 교토 법성사의 주지 자리까지 맡게 되었다. 조선의 왕손이자 불문에 든 승려가 일본 불가의 중심에 선 것이다.
히데요리의 세력을 견제하며 천하의 자리를 노리던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뜻밖에도 불심이 깊은 인물이었다. 그는 종종 교토의 법성사와 혼코쿠지를 찾아와 일연의 설법을 들으며 마음을 다스렸다고 한다.
그 소식이 히고의 기요마사 귀에 닿았을 때, 그는 천수각의 높은 누각 위에 서서 한동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닌자가 무릎을 꿇고 보고를 마치자, 기요마사의 입가에 느린 미소가 번졌다. 바람이 천수각을 스치며 기와를 낮게 울렸다.
“성문을 닫아라.”
명령이 떨어지자 성을 둘러싼 강 위의 다리가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거대한 성문이 닫히며 쿠마모토성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었다.
히데요리의 흔들리는 입지를 다지기 위해 다이묘들의 힘을 끌어모으던 시점에서, 기요마사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여러모로 충격적이었다. 특히 타케시에게는 도무지 믿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성 안은 숨을 죽인 듯 고요했다. 타케시의 거친 발소리가 복도를 울리며 기요마사의 방으로 향했다. 방 안에는 어머니 사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의원이 흰 천을 들추고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조용히 얼굴을 덮었다.
“운명하셨습니다.”
“사인은?”
타케시의 목소리에는 억눌린 분노가 섞여 있었다.
“정확히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갑작스레 돌아가실 이유가...”
의원의 말끝이 흐려지자, 타케시의 눈빛이 번뜩였다.
“독인가?”
의원은 숨을 고르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단정 지을 수는 없으나... 만약 독이라면, 오랜 시간에 걸쳐 중독되신 듯합니다.”
타케시의 시선이 어머니에게 향했다. 그러나 사키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아무 떨림도 없었다. 남편의 죽음 앞에서도 토쿠가와의 피를 이은 여인은 한 치의 흔들림조차 보이지 않았다.
“성에서 나가는 자는 그 자리에서 죽여라!.”
타케시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아버지의 죽음이 밝혀질 때까지, 그 누구도 성을 나갈 수 없다.”
그의 말에 사키가 침착하게 대꾸했다.
“사인은 병사(病死)입니다.”
타케시가 입꼬리가 비틀리며 냉소가 번졌다.
“의원도 모르는 사인을, 어찌 어머니는 그리 확신하십니까?”
“부부니까요.”
사키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내가, 모르겠습니까.”
잠시, 공기가 얼어붙은 듯 고요해졌다. 타케시는 한참 동안 어머니를 낮설게 바라보았다.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 앞에서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얼굴을, 그는 끝내 이해할 수 없었다. 몸을 일으킨 그는 무겁게 흔들리는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기요마사의 가신들이 성 안으로 몰려들어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들 사이를 지나, 타케시는 천수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둔 달빛 아래, 성 아래의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섞여 묘한 정적을 만들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미 야마토의 다이묘들과 손을 잡았다. 오사카성의 히데요리는 이제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남은 것은 오사카성과 히고뿐이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충신들은 하나둘 제거되었다. 천하는 점점 토쿠가와의 것이 되어가고 있다.
토요토미가의 가신들은 아버지를 두려워했다. 그들 사이에서 기요마사는 늘 ‘토쿠가와의 눈엣가시’로 불렸다.
타케시는 그 말을 떠올리며 식은땀이 등에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두려움은 처음으로 현실의 얼굴을 드러냈다. 게다가 어머니도, 그의 아내들 또한 모두 토쿠가와의 피를 이은 사람들이었다.
그때,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수현이었다.
그녀는 말없이 다가와 그의 곁에 섰다. 타케시는 몸을 돌려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요, 울어도.”
수현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그 안에는 안쓰러움과 염려가 섞여 있었다. 타케시는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수현은 아무 말 없이 그의 등을 쓸어내리며, 숨결처럼 낮은 위로를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