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과 일본인의 국민성을 이해하기 위해 저서 『국화와 칼』을 출간했다.
그녀는 이 책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그들의 습관이나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것을 알려고 한다면, 그들의 행동방식이 우리와 다르다고 해서 반드시 나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한 문장은 베네딕트의 문화상대주의를 가장 잘 드러낸다. 그러나 그녀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오늘날까지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일본 작가 고지마 노보루(小島襄)는 저서 『誤算の論理(오산의 논리)』에서, 바로 이 지점을 “미·일 관계 속에서 길게 이어져 온 ‘오산(誤算)’의 출발점”으로 지적하며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 일본을 본질적으로 정확히 표현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그는 일본의 역사와 문화가 외부의 시선에서 단순화되어 해석된 결과라고 지적했다. 역사는 단순히 반복되지 않지만, 인간의 사고방식과 문화적 패턴은 세대를 넘어 이어지며 마치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고 그는 설명했다.
고지마에 따르면, 지도자의 정책 결정과 결단, 전략, 그리고 미래에 대한 예측은 결국 그 지도자가 속한 사회와 문화의 사고방식에서 비롯된다. 그 사고방식은 국가의 사상과 국민성, 전통, 종교, 습관 등 복합적인 문화적 맥락 속에서 형성된다고 그는 보았다.
그는 또 “새로운 것은 없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오래된 것의 변형일 뿐이다”라고 말하며, 역사의 변천 속에서도 인간 사고의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특히 문화의 종합적 변천이라 할 수 있는 전쟁사를 통해 그 인상은 한층 더 뚜렷해진다. 전쟁의 발단에서 종결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과 패전의 양상, 그리고 장군과 병사, 시민들의 행동 속에는 그 시대를 움직이는 ‘사고의 방식’이 어김없이 드러난다.
고지마의 말처럼, 일본의 전쟁사는 결국 반복되는 사유의 패턴이 빚어낸 결과일지도 모른다. 단 한 번도 외세의 침략을 받은 적이 없으면서도, 인류 최초로 원자폭탄의 피해를 입은 나라- 그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의 아이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 대해서는 거의 배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2차 대전 패망 이후, 맥아더가 일본 정치를 대신 통치했던 약 6년여의 ‘점령기’는 학교에서 철저히 가르친다.
굴욕의 시간은 세세히 기억하면서도, 가해의 역사는 흐릿하게 남는다. 지금도 일본의 드라마와 영화 속에는 패전 당시의 공포와 궁핍, 그리고 시민들의 고통이 자주 등장한다.
그 속에서 일본은 여전히 ‘전쟁의 피해자’로 그려진다.
그렇다면, 역사를 이끄는 이는 누구일까. 역사는 정말로 반복되지 않지만,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돌이켜보면, 일본의 전쟁사는 언제나 특권계층의 이익에 따라 시작되고, 그들에 의해 끝났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서민들에게 전쟁은 ‘그들만의 일’이었다. 성 밖의 하층민에게는 성주가 누구로 바뀌든, 삶은 언제나 비슷한 하루의 반복이었을 뿐이다.
독도 문제가 한창이던 어느 날, 일본의 지하철에서 본 장면이 떠오른다. 신문 1면에는 ‘독도(竹島)’ 기사가 크게 실려 있었고, 그것을 본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말했다.
“다케시마 줘 버리지, 왜 저렇게 싸워? 일본엔 섬이 얼마나 많은데.”
옆에 앉은 어머니가 대답했다.
“그러게 말이다.”
그 순간 생각했다. 예나 지금이나 이들에게 나라의 일은 여전히 ‘정치가들의 일’인 걸까. 역사보다 더 집요하게 반복되는 것은 어쩌면 국민성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일본 사회에서 정치 참여율이 낮은 것일지도 모른다.
반면 한국은 다르다.
“한국은 단 한 번도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다”는 말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그 때문일까.
침략한 적은 없지만, 오랜 세월 침략을 받아온 역사가 사람들을 정치의 흐름에 한층 더 민감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뉴스를 틀면 온 국민이 정치 패널이 된다. 밥상머리에서도 가족은 정치 이야기를 나누고, 모임에서도, 심지어 신만이 존재하는 성스러운 종교단체 안에서도 성직자가 정치 이야기를 한다. 이제는 대통령의 일상까지도 옆집 아저씨의 생활처럼 뉴스와 대화 속에 스며 있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정말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고 있을까. 아니면 역사 속에 남은 오래된 사유의 틀을 여전히 모방하고, 변형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나마 그 변형조차 제대로 되고 있는지, 문득 의문이 든다.
베네딕트가 남긴 문장-
“다르다고 해서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이 말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처럼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름을 이해하기보다 익숙한 틀 안에서 상대를 해석하고 단정하려는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 고지마 나오키가 말한 ‘오산(誤算)’은 단지 타국에 대한 이해의 착오만을 뜻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오산, 즉 자신이 속한 문화와 사고의 방식을 절대적이라고 믿는 데서 비롯된 착각이기도 하다.
전쟁의 명분이 바뀌고, 시대의 언어가 달라져도 그 밑바탕에 흐르는 ‘사고의 방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우리가 진정 새로운 역사를 쓰려면, 먼저 오래된 생각의 틀을 자각해야 한다.
남의 문화를 오해한 채 내린 판단, 그리고 한 나라 안에서도 타 지역의 문화를 자기식으로 단정하고 해석한 시선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오산(誤算)’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참고문헌>
小島襄(1987)『誤算の論理』文藝春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