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남겨진 자들(완결)

by 릿다


타케시는 수현의 장례를 치른 지 오래지 않아, 히데요리의 어머니 요도도노로부터 서찰을 받았다. 봉인을 뜯는 순간, 그것이 자신의 운명을 뒤흔들 일임을 직감했다.


아버지 기요마사의 뜻을 이어 토쿠가와를 치라는 명이었다.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지체하지 말고 출전하라는 단호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 안에는 타협도, 유예도 없었다.


타케시는 한동안 서찰을 접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어린 마사오를 두고 성을 비우는 일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끝내 이루지 못한 뜻을 자신이 이어야 한다는 생각 또한 지울 수 없었다. 그는 결국, 그 길을 피하지 않기로 했다.


출병 전날, 그는 명이를 쿠마모토성으로 불렀다.

“마사오의 후견인이 되어주시게.”

명이의 시선은 타케시의 얼굴이 아니라, 그가 쥔 찻잔 위에 머물러 있었다. 잔에서 피어오른 김이 천천히 흩어졌다.

“이기기 어려운 싸움입니다.”

조용한 말이었다.


타케시는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잠시 숨을 고른 뒤 낮게 말했다.

“각오는 되어 있다.”

짧은 대답이었다. 더 이상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명이도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알겠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쿠마모토의 다이묘 자리는 가토 가문에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타케시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창을 열었다. 붉은 노을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고, 성 아래 마을은 하루의 끝을 향해 조용히 가라앉고 있었다.

“모든 것이 한여름 밤의 꿈 같아. 그대들과 나가야에서 참새를 구워 먹던 때가 떠오른다.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의 말은 바람에 실려 흩어지듯 조용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명이의 가슴속으로 오래 묻어 두었던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에야스와 손을 잡으면 히고는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길은 히데요리를 저버리는 일이기도 했다. 타케시는 끝내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 결정을 마지막으로, 사키는 성을 떠나 친정으로 물러났다. 그 뒤로 그녀는 더 이상 정사에 관여하지 않았다.




여름.

오사카성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연기와 화염이 하늘을 뒤덮고, 철포 소리가 성벽을 쉼 없이 뒤흔들었다. 타케시는 해자 근처에서 검을 들고 서 있었다. 피로 젖은 갑옷이 어깨를 짓눌렀다.


뒤로 물러설 자리는 없었다. 병사들이 무너지는 진형을 메우려 달려 나갔다. 타케시도 말없이 그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불꽃이 튀고, 화살과 탄환이 뒤섞여 날아들었다. 그때 무언가가 어깨를 세게 후려쳤다. 갑옷 안쪽으로 둔탁한 울림이 파고들었다.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는 무릎을 짚고 버텼다.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한 걸음 내디뎠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쓰러지고 있었다. 누가 살아 있고 누가 죽었는지 알 수 없었다. 성 안쪽에서 기둥이 무너지는 소리가 울렸다. 불길이 바람을 타고 번졌다. 타케시는 더 이상 검을 제대로 들 수 없었다. 손에서 힘이 빠졌다. 칼끝이 바닥을 긁었다.


그는 옆에서 버티고 선 병사를 바라보았다.

“진형을... 지켜라.”

말이 끝나자 숨이 크게 흔들렸다. 연기로 흐려진 하늘이 시야 위로 번졌다. 전장의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불길은 곧 그가 서 있던 자리까지 번져왔다. 오사카성의 함락과 함께, 그의 이름도 전장 속으로 사라졌다.





타케시가 전사한 뒤, 세 살의 어린 아들 마사오가 새 다이묘가 되었다. 가문의 운명은 너무 이를 나이에 그의 어깨 위로 넘어왔다. 명이는 교토 법성사의 주지 자리를 내려놓고 히고로 돌아와 마사오를 보필했다.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 어린 마사오는 어느덧 열네 살이 되어 혼례를 올렸다.

그날, 부모 자리에는 명이와 비구니가 되어 돌아온 할머니 사키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오랜 세월을 돌아, 다른 이들의 자리를 대신해 마주 앉은 두 사람이었다. 사키는 손자며느리를 맞으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쿠마모토성도 이제는 토쿠가와의 치세 아래 놓였군요. 남편이 보았다면 뭐라 했을까요.”

웃음기 없는 말이었다.


명이는 조용히 찻잔을 들었다 내려놓았다. 사키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타케시는 남편처럼 고집불통이 아니길 바랐지만... 결국 한 피가 흐르는 부자지간이었어요. 의리를 위해 죽었다지만, 남겨진 자들에겐 허망한 죽음이었을 겁니다.”


그녀는 찻잔을 비우며 낮게 덧붙였다.

“이제 세상은 에도로 향한다지요. 전쟁은 끝났다고들 하지만... 글쎄요. 칼을 거두었을 뿐, 싸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겠지요.”


명이의 얼굴에는 말 없는 미소가 어렸다. 사키는 굳이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마당을 바라보았다. 눈부신 벚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며 하얀 비처럼 내리고 있었다. 한동안 꽃잎이 떨어지는 소리만이 고요히 이어졌다.

“남편이 늘 하던 말이 생각나는군요. 벚꽃의 생명은 허망하도록 짧지만, 피어 있는 순간만은 참으로 아름답다던 말이요.”

사키의 목소리가 바람에 섞여 흩어졌다.


명이도 천천히 고개를 들어 벚꽃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아름답군요.”

사키의 눈이 반달처럼 휘어지며 소녀 같은 미소가 번졌다. 처음 쿠마모토성에 들어서던 그 날을 떠올리는 듯했다.


그 사이, 신랑인 마사오가 방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그는 할머니 사키와 명이에게 깊이 절을 올린 뒤, 예식에 따라 혼례를 치렀다.


혼례가 끝난 뒤, 명이는 세속의 이름과 지위를 모두 내려놓았다. 오랫동안 짊어졌던 자리와 역할을 벗고, 그는 다시 한 명의 승려로 돌아갔다. 이제 그는 왕족도, 이름 높은 고승도 아닌, 바람이 드나드는 절의 한 구도자로 살아가고자 했다.

그렇게 고요한 날들이 히고를 지나가던 어느 날, 쿠마모토의 젊은 다이묘 마사오가 법당을 찾았다.


“일연 스님, 이건 내가 직접 깎은 목각상이에요. 스님과 꼭 닮았지요?”
마사오는 무명옷 차림이었고, 발에는 흙이 묻어 있었다. 반질거리는 마루 위로 흙 발자국이 하나둘 찍혀 갔다.

그는 목함을 열어 작게 조각한 승려의 상을 꺼냈다. 솜씨를 자랑하듯 웃는 얼굴에, 명이도 따라 미소 지었다.


“내가 이렇게 웃고 있습니까?”
“그럼요, 늘 나를 보며 이렇게 웃으십니다.”

명이는 조각상을 들여다보다가 물었다.
“그런데 이 눈은 왜 이렇게 멀리 뜨고 있습니까? 고승의 상은 대개 눈을 내리뜨고 있지요.”

마사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스님은 늘 서쪽 바다를 바라보시잖아요. 이렇게요.”


그는 고개를 들어 명이의 흉내를 냈다. 명이는 웃으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단단해진 어깨에 세월이 묻어 있었다. 잠시 뒤, 명이의 시선이 문 너머로 향했다. 활짝 열린 창밖, 서쪽 바다가 빛 속에서 잔잔히 일렁이고 있었다.


저 바다 끝에는 늘 한 사람이 서 있는 듯했다. 저물어가는 햇살 속에서, 수현이 손을 흔드는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함께 바다를 바라보던 마사오가 물었다.

“스님은 왜 그렇게 바다를 오래 바라보십니까?”

명이는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

“...그리워서요.”

그는 다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서쪽 하늘 끝, 은빛 윤슬이 파도 위에서 조용히 흔들렸다.





함께 해 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keyword
이전 14화14화- 생과 사의 문턱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