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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밤별 May 21. 2020

당신은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까?

이야기 13. 독립생활 시작

드디어 잔금을 치루는 날. 아침부터 냉수를 마시고 정신을 바짝 차리자고 다짐했다.

모든 계약은 신중해야하지만 특히 내가 긴장했던 이유는 이 계약은 엎어질뻔한 전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2개월 전, 계약서를 작성하고 계약금을 입금하던 날이었다.

그 날도 떨리는 마음에 직장 동료에게 부동산까지 동행을 부탁했다. 그 동료는 나와 동갑인데 이미 2번의 전세계약을 거쳐 자가를 마련한 나에게는 부동산 고수와 같은 존재였기에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화가 찾아올 것 같았다.


계약서에 싸인하기 전 등기부등본에 잡혀있는 대출 내역을 확인하고(이건 이미 알고 있었던 내용이었다. 내가 잔금을 치르면 그 돈으로 대출을 전액 상환하기로 미리 협의) 집 주소를 보고 특약사항을 꼼꼼히 살펴보며,

'나는 부동산 계약이 처음이지만 절대 티 내지 않겠어. 이렇게 계약서를 보고 있으면 뭔가 까다로운 사람처럼 보이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동산 중개인은 물론 임대인도 내가 이런 계약에 서툴다는 것은 단박에 알아차리셨을 것 같다. 원래 초보란 온몸으로 초보의 기운을 내뿜기 마련이니까.

어쨌든 그럴싸한 표정으로 계약서를 살펴본 후 중개인에게 계약서를 넘기고 도장을 주섬주섬 꺼냈다. 입사할 때 받은 것 같긴한데 정확히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는 길다란 도장을 케이스도 없이 꺼내니 영 어리숙해보이는 것 같아 살짝 후회가 밀려왔다. 도장지갑 하나 살껄.


그런데 그 때, 임대인이 말했다.

"사장님, 계약서에 주민등록번호 잘 보세요. 내가 등본을 하나가져왔음 좋았을껄"

응? 뭘 잘 보라는거지? 등본이 왜 필요한거지?


알고보니 1년 전 쯤 임대인은 생년월일을 바꾸면서 주민등록번호를 바뀌었는데, 이러한 이유때문에 부동산 등기에는 예전 주민등록번호로 건물의 소유 권한 및 대출이 잡혀있었고 새로운 계약서에는 변경된 주민등록번호가 적혀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임대인은 주민등록번호 변경이력이 나와있는 등본이 있으면 혹시라도 생길 수 있는 번거로움을 줄일 수 있었을텐데- 라는 의미로 저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하지?

이 정도 문제는 흔하게 있는건가? 계약서에 등본을 뽑아서 별첨으로 붙이면 되는건가?

안그래도 잘 모르는데 100% 모르는 문제가 나오니 머리가 하얘졌다.

모르면 일단은 가만히 있어보자. 나의 동료도 조용한 걸 보니 아직은 그리 심각한 상황은 아닌가보다.


그 때 구세주처럼 중개인분이 말씀하셨다.

"아 사장님, 그러면 등기부등본상에 있는 주민등록번호부터 바꾸시고 다시 계약하기로 해요. 저 친구가 대출도 받아야 하는데 소유자랑 계약자 주민등록번호가 다르면 여러모로 복잡해 질 수 있어요"

두 분은 벌써 몇 차례 계약을 통해 안면이 있는 상태기도 했고, 임대인분도 경우가 없는 분은 아니셨기 때문에 흔쾌히 받아들이셨다. 그리고 나에게 번거로운 걸음을 하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겉으로는 "아니에요. 깔끔하게 하는게 저도 좋지요. 그럼 다음주에 뵐게요" 하며 마스크 위로 보이는 눈으로 자연스레 웃어보였지만, 속으로는 "와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라고 쾌재를 불렀다.

부동산에서 나오는 길에 동료에게 물어보니 본인도 그냥 등본 붙이고 계약하자고 하면 자리를 엎으려고 준비중이었다고 하는게 아닌가. 아 이건 그냥 넘어갈 상황이 아니었구나. 그 때서야 확실히 알았다.


우여곡절 끝에 계약금을 입금하고 잔금입금일 까지는 약 2달 정도의 텀이 있었다.

그 사이에 코로나는 조금 더 심해져서 내가 집을 구할 때까지만 해도 거의 없었던 전세 매물이 늘어나기도 했고, 내가 계약한 금액보다 조금 낮은 금액의 집이 나와 아쉽기도 했지만 여러모로 마음에 드는 집이라 일단 고!하기로 했다.


잔금을 치르는 날은 나 혼자 부동산에 다녀왔다.

그날은 잔금도 치르고 내가 보내드린 금액으로 은행에 가서 대출을 상환하는 것도 봐야했기에 짧은 점심시간을 쪼개 바쁘게 움직였다.

카카오뱅크에서 대출금보내기를 누르자 억단위의 돈이 내 통장을 스치지도 않고 임대인 통장으로 넘어갔다. 대출금에 내가 가지고 있던 돈을 탈탈 털어 임대인에게 보내고 잔금을 치뤘다는 영수증을 받았다.

아 정말 집이 생겼구나. 계약이 됐구나. 실감이 났다.


잔금을 치룬 후 함께 은행으로 갔다.

일반적으로는 임대인과 부동산 중개인만 함께가서 대출을 상환하고 영수증을 확인하는 식으로도 많이 진행한다고 하던데, 나는 내눈으로 보는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함께 갔다.

은행에 가는 동안 처음으로 임대인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엄마보다 나이가 10살쯤 많으시고, 딸이 3명인데 둘째는 외국에서 공부하느라 아직 결혼을 안했으며, 첫째 사위는 SKT 상무, 막내 사위는 의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은행에서 대출을 상환하는 일도 일사천리였다. 여기서도 돈을 찾을 필요도 없이 창구에 앉아 통장에 있는 돈으로 대출 상환해주세요. 라고 말하니 그 많던 대출이 0원이 되었다.

오늘 내 눈앞에는 백원짜리 하나 나타난적이 없는데 난 전세계약을 마쳤고 임대인은 억 단위의 대출을 갚았다. 새삼 신기한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휴대폰에 숫자만 생겼다 없어지는 상황이 뭔가 낯설게 느껴졌다.

은행을 나오며 대출기록이 말소되기까지는 약 일주일 정도 걸리는데 등기부등본이 정리되면 알려주시겠다고 중개사분이 말씀해주셨다.


아침에 냉수를 마시며 긴장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모든일은 물 흐르듯 끝났다.

11시 40분에 만났는데 헤어지며 시계를 보니 채 1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그 잠깐 사이에 많은 것아 바뀌어 있었다.


독립생활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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