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14. 말하지 않아도
지난 몇 주, 힘든 시간을 보냈다.
마땅히 털어놓을 곳도 없어 혼자 끙끙 앓다 보니 그 무게를 고스란히 견뎌야 했던 몸 이곳저곳이 아파지기 시작했다. 긴장한 채 굳어버린 어깨는 잠자리에서 늘 속을 썩였고 시시때때로 저릿해지는 팔은 주물러도 나아지질 않았다. 그러나 마음의 병에는 별도리 없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는 생각으로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 드디어 화요일. 나를 몇 주간 힘들게 했던 일의 결과가 나오는 날이었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지만 그 날을 기다리면서 나는 '퇴근하면 집으로 갈 거야'라는 생각만 되뇌었다. 부모님 집으로 가자.
"엄마 오늘 나 퇴근하고 집으로 갈래. 내일 또 출근해야 하니까 괜히 장 보지 말고 있는 반찬에 숟가락 하나만 얹어줘요. 집 가면 늦으니까 밥 먼저 먹구"
"무슨 일 있는 거야?"
나의 말에 엄마는 대뜸 걱정부터 하셨다. 독립한 후 한 번도 평일에 집에 간 적이 없었으니 얘가 분명 무슨 일이 있구나 생각을 하시는 것도 당연하다.
"없어. 주말에 수박 산거 달다고 먹으러 오라며~ 그래서 가는 건데?"
엄마가 속상해하실 테니까, 그거 말고 그냥 가는 걸로 하고 싶었다.
집에 가는 길에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 집에 온다며? 무슨 일 있어?"
"아 없어~ 자꾸 그러면 안 간다?"
"알았어. 빨리 와"
나는 오늘 아무 일도 없고,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집 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그리고 엄마, 아빠는 내 말을 하나도 듣지 않았다.
누가 봐도 오늘 한듯한 구첩반상이 상을 채우고 있었고, 두 분 다 식사를 하지 않으신 채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뭐야 이러지 말라니까"
괜한 투정 섞인 목소리로 집에 들어서는 나를 맞아주는 부모님, 한순간에 몸과 마음이 녹아내렸다.
집이다. 집에 왔구나.
손만 대충 씻고 식탁에 앉으니 중앙에 동그랑땡이 놓여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거.
보기에는 노란 계란물을 입은 작은 구슬 같아 간단해 보이지만 만드는 과정은 녹록지가 않다.
두부를 으깬 후 광목천으로 감싸 물기를 짜낸다.
다진 고기 양념해서 볶아내고 잘게 썬 각종 야채를 섞어준다.
모든 재료를 큰 그릇에 담아 찰기가 생기도록 섞어 준 후 둥글게 말아 밀가루와 계란을 묻혀 프라이팬에 부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계는 두부에 물기를 짜내는 작업이다. 이걸 제대로 하지 않으면 동그랑땡이 싱거워질 뿐 아니라, 물기를 머금은 두부가 동그랑땡이 뭉치는 걸 방해해서 전이 부쳐지는 동안에 다 풀어져버린다. 제법 힘이 들어가는 작업이라 손 힘이 약한 엄마는 혼자서는 동그랑땡을 만드시지 못한다. 그 말인 즉, 오늘 아빠가 일찍 퇴근했다는 것이다.
엄마가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반장선거가 있는 날은 집에오는 내 발소리만 들어도 결과를 알 수 있다고.
아무렇지 않은 척 전화를 걸고 무심한 듯 말했지만 엄마는 내 숨소리만 듣고도 모든 걸 아셨겠지.
무슨 말을 했더라. 채 이틀도 지나지 않은 일인데 그날 밥상에서 나눈 이야기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밥을 먹는 동안에도 엄마는 수수부꾸미를 구웠고 감자떡을 쪘다.
내가 숟가락을 놓기 무섭게 아빠는 김치냉장고에서 수박을 꺼내왔다.
냉장고를 열면 나는 한자리에서 세개씩 마시지만 우리가족은 하루에 한개도 마시지 않는 남양요구르트가 한바구니 가득 담겨있었다.
전화로 무슨 일이 있는지 여러 차례 물으셨던 엄마, 아빠는 내가 집에 머무르는 동안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다.
나도 내 마음 한구석에서 무겁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덩어리를 꺼내보이지 못했다.
그런데 동그랑땡이 다 녹여버렸다. 얼음땡 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