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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 Apr 06. 2020

지금 저 취조하시는 거예요?

결혼할 인연은 한눈에 알아보더라.



남편과는 무더운 여름날 소개팅으로 처음 만났다. 더운 여름날이라 카페에 자리가 없었고 여러 카페를 돌아다니다 결국 작은 호프집에서 웰치스를 주문하고 앉았다. 호프집이라 그런 지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고 덕분에 둘이서 조용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남편과는 필리핀 어학연수에서 만난 친한 언니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다. 처음 만나자마자 남편은 나에게 꽤 심도 있는 질문을 쉴 틈 없이 쏟아냈다. "혜연이와는 어떻게 친해지게 되셨어요?" "필리핀 연수는 왜 가게 되었나요?"와 같은 무게 있는 질문들이었다.


남편을 소개해준 언니와의 인연도 특별했다. 우연한 계기로 21살에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가게 되었다. 기숙사가 딸린 어학원이었고 혼자 있는 걸 좋아했던 나는 1인실을 신청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보니 1인실에 방이 없어 3인실로 배정이 되었고 일주일 뒤 방을 옮겨주겠다고 했다. 같은 방을 쓰는 언니들은 둘이 친구사이였고 동생인 나를 잘 챙겨주었다. 당시에 나는 조금 까칠했는데 언니의 표현으로는 내가 고슴도치 같았다고 한다. 일주일이 지나고 1인실로 방을 옮기려고 했는데 언니들은 계속 같이 방을 쓰자고 했다. 언니들이 좋았지만 나도 모르게 "생각해보고요"라고 말했고 나의 퉁명스러운 말에도 언니들은 계속해서 방을 같이 쓰자고 설득했다. 못 이기는 척 같이 방을 쓰게 되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언니들과는 잘 지내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까칠한 동생을 보듬어준 고마운 언니들이다.


언니와는 어떻게 친해졌냐고 묻는 남편에게 방을 같이 쓰게 된 얘기를 해주었다. 얘기하다 보니 어릴 때 나의 까칠했던 과거까지 털어놓고 있었다. 보통은 통성명하고 난 뒤에 주말엔 뭘 하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와 같은 노멀한 질문을 했던 이전 소개팅과는 느낌이 너무 달랐다. 그렇게 만나서 30분 정도를 나에 대해 얘기하다 보니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왜 나만 얘기하고 있는 거지? 난 이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지금 이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싶었다.

 

“지금 저 취조하시는 거예요?"  



남편의 질문에 대한 답변 대신 훅 들어간 내 질문에 남편은 적잖이 당황했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는 듯이 놀라더니 금세 본인이 왜 질문을 많이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랜 유학생활로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반복되었고 상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속마음이 궁금해서 자기도 모르게 질문하는 습관이 생겼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고는 묻지도 않았는데 본인의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남편의 얘기를 듣는 동안 중간중간 끼어들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꾹 참았다. 어떤 경험을 했고 그 경험을 통해 느낀 점이 무엇인 지, 어떠한 일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무엇인 지를 얘기할 때는 소름이 돋았다. '가치관이 같다는 게 이런 거구나... ' 지금까지 어떤 남자를 만나도 이렇게 생각이 비슷한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남편과 처음 만날 당시 내 나이는 서른 하나였는데 여자가 서른이 넘으면 주변 사람들의 오지랖에 시달리게 된다. 나 역시도 서른이 되고 나니 미혼인 남자들과 이어주려는 주변의 오지랖에 시달려야 했다. 회사에서 일하는 것도 힘든데 개인적인 영역까지 침범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많이 힘들었었다. 그래서 오지랖에 대한 피곤함을 덜어보려고 남자 친구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지인들에게 이제부터 소개팅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앞으로 10명 소개팅하면 그중에 한 명정도는 괜찮은 사람이 있지 않겠어? 나 소개팅할래!"


그동안 소개팅은 내키지 않아 미뤄왔는데 이제는 사람만 좋으면 만나볼 의향이 있다고 주변에 얘기했다. 정말 10명을 만나 볼 생각이었는데 10명을 채우기도 전에 첫 소개팅에서 남편을 만났다.


결혼 전에 비혼 주의는 아니었지만 결혼은 선택이라고 생각했었다. 연애에 대한 환상이라던가 결혼에 대한 기대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첫 만남에 운명 비슷한 느낌을 받으니 정신이 없었다. 평소에 그리던 내 타입의 남자는 아니었지만 왠지 이 남자와 오래 만날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남편에게 첫 만남이 어땠는지 물어보니 '이 여자와 결혼을 그려볼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결혼할 인연은 한눈에 알아본다고 누가 그랬던가? 우리는 결혼할 인연을 한눈에 알아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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