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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밤 Aug 01. 2017

[인터뷰] 'FTM’으로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트랜스젠더 산호

*FTM : Female to male의 줄임말. 성전환 남성.          


태국 여행 갔을 때 일화다. 길을 걷는데 친구가 내 옆구리를 찔렀다. “저 봐. 저 사람도 ‘트랜스젠더’잖아. 여기 엄청 많아” 그럴 때마다 난 “그래, 여긴 한국 아닌 태국이잖아” 무심하게 답했다. 태국이 성 소수자 차별이 덜한 나라란 건 알던 사실이었다. 내 머릿속엔 오로지 망고 생각뿐이었다. 마트에서 망고를 쓸어 담아 계산대에 갔다. 그 계산원도 ‘트랜스젠더’였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외관만으로 그 사람의 성 정체성을 판단하는 건 무리하고도, 무례한 일이다.) 길에서와 달리 나는 그 장면이 낯설었다. 한국에서는 사람을 직접 응대하는 일을 하는 트랜스젠더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왜 한국에서는 그런 일이 없을까? 이 인터뷰는 그 사소한 질문에서 출발했다.           


'산호'를 만난 건, 3년 전 가을이었다. 귀 밑까지 오는 짧은 머리에 단출한 면 티셔츠, 곱상한 얼굴. 그는 나를 보자마자 “이 친구 어디가 좋아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애인의 친구를 처음 만나 잔뜩 얼었던 나는 그 질문에 오히려 마음이 풀렸다. 그 후로 3년 동안 봐온 그는 늘 그랬다. 대화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말을 걸고, 시시한 농담에도 곧잘 웃었다. 그에겐 사람을 편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한 달 뒤 그가 호적정정을 마치고, 주민등록증을 새로 발급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알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이미 성전환 수술을 하고, 호적정정 판결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반 정도 다시 태어난 거 같아요     

성전환 수술 이후의 최대 난관이었던 취업에 성공한 그는 요새 훨씬 여유가 생겼다. 주민등록증 숫자를 ‘1’로 바꾼 뒤 회사도, 직업도 바꿨다. 그는 이제 회사에서 ‘남자’로 통한다. “수술 전에는 사람들이 긴가민가하면서 바로 눈이 아래로 가더라고요. 가슴이 튀어나왔나, 안 튀어났나. 남자야? 여자야? 하면서 내기하는 사람도 있고, 직접 와서 물어보는 사람도 있어요.” 수술 전에는 남자로 봐주기만 해도 좋았다. 여자 화장실에 갈 때 사람들이 놀라면, 민망하면서도 날 남자로 봐주는가 싶어 기뻤다. 수술한 후부터는 남자 화장실을 이용한다. “불편한 건 없어요. 오줌 싸는 타이밍을 다른 사람 안 갈 때 빨리 가서 누면 돼요. 맨날 좌변기 쓰는 게 들키면 회사에서 의심할 거 아니에요. 너 오줌 앉아서 싸냐고. 그 오줌 싸는 기구, 패커(packer)가 잘 되면 좋았을 텐데. 그게 자꾸 새 가지고.” 작년에 25만 원이나 주고 구매했는데 그게 자꾸 질질 샜다. 한창 취업 준비로 학원에 다닐 때라 더 난감했다. “술 마시면 꼭 실패를 안 해요. 흥청망청해서 이렇게 그냥 널래 널래 싸면 안 새고, 제정신에 긴장해서 싸면 꼭 흘리더라고요.”     


그렇게 혼자 속으로 삭히는 화장실 문제 빼고는 사회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은 제법 줄었다. 이전 회사에서는 왜 ‘언니’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지, 왜 ‘남자처럼’ 하고 다니는지 설명해야 할 일 투성이었다. 지금은 모두 그를 ‘남자’로 알기 때문에 편하다. 반면 소위 ‘남자들의 세계’를 알아가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다. “회사 사람들이 좋긴 한데 약간 부담스러워요. 예쁜 여자 있으면 막 보라고 그러고. 바람피우는 얘기도 막 하고. 와이프 분 계시지 않냐고 하면 너는 어떻게 한 가지 음식만 먹고 사냐고 그래요. 부대찌개가 있으면, 김치찌개도 있고, 된장찌개도 있는 거지. 여자를 음식으로 생각하는 거 같아요.” 그는 이 ‘남자들의 세계’가 영 불편하다. 여자를 ‘먹을 것’ 정도로 대하는 태도가 불편하지만, 티를 내면 또 ‘남자답지’ 못하다는 의심만 사니 장단을 맞추기도 맞추지 않기도 어렵다. “그냥 가만히 있기는 하는데. 모르겠어요. 내가 고추가 없다 보니까 진짜 고추를 가지면 저런 건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왜 저럴까.” 산호는 생식기 수술은 하지 않았다. 4년 전 가슴과 자궁 절제 수술을 한 뒤 호르몬 주사를 꾸준히 맞고 있다. 생식기 수술은 비용만 3~4천만 원에 달하고, 수술 전후 일을 쉬어야 하니 그 기간을 버틸 생활비도 필요하다. 한다 해도 부작용이 심하다. 오줌 줄이 막히기도 하고, 오줌이 질질 새기도 한단다. 그래도 돈만 있으면 하고 싶다. 보이지 않아 별 것 아닌 거 같지만, 배가 아파 대장내시경 한 번 받으래도 ‘고추’ 없는 걸 들킬까 걱정이다. 수영장이나 목욕탕을 가도 ‘거기’가 신경 쓰인다. 결혼을 한다 해도 배우자의 가족들이 그를 ‘남자’로 받아들일까. 늘 그 지점에서 물음표가 뜬다.     


그와 같은 트랜스젠더에게 패싱(passing)은 늘 이슈이다. 패싱(passing)은 의심 없이 사람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성별로 받아들여진다는 뜻이다. 성전환 수술을 하면 끝날 것 같지만 수술 이후의 삶도 검열의 연속이다. 그 역시 자신은 "반 정도 다시 태어난 거 같다"라고 말한다. 그래도 가장 달라진 건 주민등록 뒷자리의 첫 숫자. 호적 정정이래 봤자 그 숫자가 바뀌는 것뿐인데도 삶에 주는 영향은 크다. 그 숫자가 바뀌지 않으면 외관상 성별과 주민번호상 성별이 일치하지 않아 등본 하나 내기 곤란하다. 그러다 보니 서류를 낼 필요 없는 일용직을 전전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불안한 경제적 위치에서 호적 정정을 위해 고비용의 수술하는 일 역시 만만치 않다. 산호도 20대 내내 모은 돈을 모두 가슴과 자궁 절제 수술을 하는 데 쏟았다. 수술 없이 호적정정을 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고비용과 고위험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나’로서 사는 방식이 그만큼 다양해서이기도 하다. ‘굳이’ 성별을 알려주는 주민등록번호와 각종 공문서의 성별 표기란만 사라져도 고통이 덜할 것이다.     


전 그냥 다 레즈비언인 줄 알았어요     

“어릴 때부터 친구들한테 난 남자라고 얘기했어요. 그러면 “어, 너 남자 해” 그랬죠. 다들 그러든지 말든지 했어요. 어릴 때는 남자, 여자 그런 성별 구분 잘 몰랐으니까요.” 언제부터였을까. 어릴 때는 문제가 되지 않던 ‘성 정체성’이 중요한 삶의 이슈로 떠올랐다. 2차 성징이 오면서 혼란이 시작된 거다. 그전까지 당연히 “나는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가슴이 나오고, 생리를 했다. 어느 날 엄마가 브래지어를 사 왔다. 그는 ‘여자 거’라며 한 번도 입지 않았다. 교복 치마를 입는 일도 고역이었다. 학교는 철저하게 남녀를 구분했다. 줄 하나를 설 때도, 짝을 정할 때도, 체육시간에 옷 갈아입을 때도 그는 ‘여자’로 구분되었다. 신이 있다면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어릴 때는 엄마가 걸어둔 십자가를 보며 “이팔 저팔” 욕도 많이 했다. 왜 이렇게 태어나게 했냐고. 그러나 처음부터 성전환 수술을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그는 스물세 살이 되어서야 자신이 ‘트랜스젠더’라는 걸 알았다.    

  

“이십 대 초반까지는 헷갈렸던 거 같아요. 나는 남자인데, 몸은 여자고. 그럼 나는 레즈비언인가? 아닌가? 그러다 성소수자 홈페이지 게시판에다 ‘전 뭘까요’라고 글을 올렸어요. 거기서 대화하면서 ‘나는 트랜스젠더였구나’ 싶었어요. 저는 그냥 다 레즈비언인 줄 알았어요. 트랜스젠더란 걸 모를 때니까. 그 커뮤니티를 만난 게 신의 한 수였죠.”     


남자로 살 수 있단 사실을 알자마자 폭풍 검색을 시작했다. FTM카페에 올라오는 이야기는 대부분 부정적이었다. 불리한 위치를 이용해 함부로 대하는 의사들, 수술 후 부작용, 성별 구분이 안 되는 외모 때문에 일용직을 전전한다는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나도 이렇게 살아야 하나” 막막했다. 그러던 차에 트랜스젠더 인권단체에서 연 성전환 수술 강연을 들었다. 제대로 된 수술 정보를 접한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때 만나던 여자 친구도 “나는 네가 원하는 모습이 무엇이든 너를 지지해줄 것이다”라며 용기를 줬다. 따로 살고 있을 때라 부모님한테는 알리지 않았다. 1년 간격으로 가슴과 자궁을 절제하는 수술을 했다. 아팠다. 가슴수술은 참을 만했는데, 자궁수술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이 아팠다. 회복하는 데도 몇 달이 걸렸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일주일을 누워 있다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엄마에게 그는 어릴 때부터 남동생한테 고추 따서 달라던 신기한 ‘딸’이었다. 수술한 뒤부터 엄마는 “그때 네가 왜 그랬는지 알겠다”며 차근차근 ‘아들’을 다시 배워 나갔다. 가끔 실수로 본명이 튀어나올 때가 있지만 그를 ‘아들’로 대해주었다. 호적 정정할 때 동의서도 써주었다. 가끔씩 “손발은 이렇게 작은데. 천생 여자인데”하며 그의 손을 잡기도 한다. 그래도 그 정도면 됐다. “완전히 남자라고 생각은 안 해도 인정해주는 엄마”가 그는 고맙다.      


수술 이후에 더 깊어진 고민도 있다. 이전에는 상대가 그를 여자로 알고 만나 자연스럽게 FTM이란 걸 알게 됐다면, 이제는 남자로 알고 만날 텐데 생식기가 다른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다. 수술을 한다고 ‘완벽한 남자’가 되는 것도,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한다. “FTM들은 자기가 FTM인 거 숨길라 그래요. 수술하고 나면 일반인처럼 살아가니까 자기가 FTM이었다는 사실을 꺼내놓고 얘기하는 거 자체를 싫어해요. 전 뭐.(침묵) 전 그냥 남자가 아니라 FTM인 거 같아요. 이제 남자로는 살 수, 살기는 힘들 거 같고 FTM으로 살면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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