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5번 버스를 타고 솔샘터널 꼭대기에 내려 끝도 없는(듯한)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점심을 부지런히 먹고 1시까지 어르신의 집에 도착해야 한다. 장애인콜택시가 나보다 먼저 도착해서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을라치면 오매불망, '이 선생님 도대체 언제오시나?'불안해하며 기다리고 있을 어르신의 표정이 떠오르니 쉴 새가 없다. 계단을 다 오르면, 그야말로 숨이 턱! 막힌다.
작년 가을쯤, 단순하게 몸 움직이며 돈을 벌 수 있는 일, 마을과 가까운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다 재가요양보호사라는 일자리를 떠올렸다. 생각이 많고 그만큼 몸도 굼뜬 경향이 있는데, 몸 있는 곳에 마음 두며 담백하게 살고 싶은 마음의 반영이기도 했다. 하고 싶은 일을 내적 자원 없이 외부에서 지원받아 하려니, 지원이 끊겨도 지속되는 생계는 늘 불안에 쪼들렸다.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지낸 게 사실이었는데, 그렇다보니 규모 있는 삶을, 또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기도 어려웠다. 또 그 나름대로 모험적(?) 삶이라 여기며 지냈다. 적어도 생계를 위한 기본 생활비는 안정적으로 꾸리자, 하며 선택한 임노동이 요양보호사였다.
“젊어서 어렵겠네요.”
구인 포털에 요양보호사 광고는 많았지만 젊은 요양보호사는 취업하기가 어려웠다. 처음 만났던 어르신은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면서 언제 퇴원하실지 모르는 상황이 되어 서비스 자체를 취소하셨다. 아쉬운 마음으로 그저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가까운 재가요양센터로 먼저 연락을 하기도 하고, 당시 살고 있던 집 바로 건너편에서 매일 점심때마다 동네 어르신들을 모시고 무료 식사 나눔을 하는 곳이 있어서, 그곳에 자기소개서와 연락처를 적은 종이를 들고 찾아가기도 했다.
그런데 대체로 재가센터에서 나를 거절한 이유는 내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거였다. 연락을 준다고 하고서는 깜깜무소식.. 다시 전화해서 물어보면 대부분 그 이유를 댔다. 젊은 사람들은 어르신들 비위를 못 맞추고, 질려서 금방 그만 둔다고, 30대는 처음이라고. 젊어서 왜 이런 일을 하냐는 의구심도 보였다. 어떤 계기로 공부하게 됐고, 어떤 마음으로 일하려고 한다,는 대답을 똑 부러지게 하면서도, 젊다고 무조건 다 맞추고 헌신할 수 있는 듯 증명하지 않으려 애썼다.
지금 만나고 있는 어르신과의 첫 만남은 지난 늦겨울이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중 매일 오후 1시에 만나 4시나 5시에 헤어진다. 장애인콜택시를 타고 재활원에 가서 운동을 하시거나,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 등의 외래진료를 받는다. 집에 돌아오면 화장실로 모시고 손 닿지 않는 어르신의 밑을 확인하고 닦아드리고, 옷을 갈아입힌 뒤에 침대에 눕혀 발마사지와 다리 운동을 돕는다. 아침 저녁으로 내 안부를 물으시고, 지칠까봐 음료와 간식을 챙겨주셨다. 어떤 날은 친구들과 자취한다는 이야기 기억하시고서 김치냉장고에 있던 묵은 총각김치와 김, 자반 등을 챙겨주신 날도 있었다.
시간이 흘러흘러 여름이 왔다. 일이 어느정도 몸에 익숙해지던 찰나, 날까지 무더워지면서 체력이 달리고 힘이 들기 시작했다. 이전처럼 내가 먼저 어르신의 필요를 묻고 살피기보다, 일이 빨리 끝났으면! 하는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오던 날... 어르신도 더운 날씨와 개인적 가정사로 스트레스와 짜증으로 한창 예민하신 때였을거다.
외출을 했다가 장애인콜택시 대기자가 너무 많아 길에서 허비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집에 돌아와서 남은 짧은 시간동안 해야 할 일을 부단히 재촉하시는 어르신. 외출용 휠체어의 바퀴를 걸레로 닦고, 거실과 가까운 화장실에서 걸레를 빨고 있었더니, 화장실에서 뭐하고 있냐고, 뭐가 중요한지 모르냐며 빨리 와서 안방 화장실에 가자고 닦달하시는 것. 안방 화장실의 상태를 요목조목을 따지고 지적하시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업무를 지시하셨다. 굳은 표정으로 어르신을 다시 거실로 모시고 화장실로 돌아와서, 바닥에 흥건한 물을 무릎 굽혀 닦는데, 몸은 습기와 땀에 절고 내가 왜 이런 생고생을 하고 있나, 싶어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와! 정말, 일하기 싫다!
요즘같은 여름날, 어르신을 만나고 땀에 흠뻑 젖어 집에 돌아오면 1시간 이상은 방전이 되어 멍 때리고 누워 있어야 한다. 오른발등과 발목, 오른팔과 손목 중심으로 내 몸이 많이 틀어져있는 걸 연신 뼈마디에서 두둑 거리는 소리와 욱신거리는 근육통으로 확인한다. 88kg의 어르신을 휠체어에서 침대로, 휠체어서 화장실 변기로 이동 보조하는 건 꽤 많은 힘을 요구한다. 몸을 쓰는 일을 하다보니 열량 높은 간식에 대한 욕구는 솟구치고, 실제 배고픈 필요보다, 달거나 짠, 포만감 그득한 음식을 ‘씹어 먹으며’ 스트레스를 풀고 싶은 마음도 올라온다. 시급 8,400원 어치만큼 일하고 싶은 생각, 그런 한편 그에 상응하는 엥겔지수와 시발비용은 한정없다. 어르신이 사는 아파트, 병원을 오가며 엘리베이터 안에서 땀 냄새로 쩔은 택배기사, 음식 배달부, 또 아스팔트 길 오가며 밖에서 일하고 쉬는 야쿠르트 판매원, 공사장의 인부들을 보면 이 더운 여름 날,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일하십니까?" 붙잡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숨 막히는 건, 힘이 드는 걸 힘들다고, 하기 싫은 걸 하기 싫다고 말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었다. 일 마치고 돌아온 집에서 같이 사는 이가 아프다는 소리를 했는데, 그야말로 그 소리가 징징대는 것 같아 듣기 싫고, 피하고 싶은 순간이 있었다. 아픈 사람이 아프다고 말하는데, 그 아프다는 소리가 곤혹스럽게 다가오는 지경이라니.. 나는 아프고 힘들어도 참고 견디고 있는데, 그 와중에 아프다는 소리를 하니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어떤 방법이 없는데도, 어떻게 해줘야할 것만 같은, 막연한 마음의 부담감만 남았다. 함께 사는 삶을 지향한다던 스스로가 궁색해보였다.
힘들면 힘들다고 왜 말을 못하니?
지난 5개월 남짓 어르신을 만나면서, 사람이 아픈 상태는 단순히 아픈 증상 그 자체가 아니라, 몸이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 상태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몸 상태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마음의 정도와 바라는 수위를 그에 맞게 조절한다면 아픈 상태는 더 이상 아픈 상태가 아니다. 그러나 사고는 늘 내가 하고 싶은 만큼, 내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할 때, 나도 잘 모르는 나를 지나치게 과신할 때 일어난다.
휠체어에서 주로 생활하는 어르신이 화장실에 오고 갈 때나 침대에 눕고 일어날 때, 모든 움직임에 부축이 필요하다. 그런 어르신이 자주하시는 말 중에 하나는 “대강대강 해”와 “선생님이랑 하면 할 수 있어”라는 말. 전자는 꼼꼼한 만큼 느린 내 성질을 채근하는 표현이고, 후자는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힘을 분별하기 어려운 당신을 드러내는 말이다. 어르신이 스스로 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앉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면 옆에서 지켜보는 이들은 난감해진다. 일어선 상태에서 어찌할 바 몰라 힘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으면 그때는 119를 불러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
어르신과 함께 종종 국립재활원에 가서 1층 복도에 있는 안전손잡이를 잡고 걷기 운동을 한다. 어르신이 휠체어에서 일어나서 지팡이를 짚고 몇 걸음 걸으면 나는 그 뒤에서 휠체어를 갖고 천천히 따라간다. 의욕이 앞선 마음은 이미 저 복도 끝에 가있다. 손잡이를 잡은 팔이 멀찌감치 있고, 그만큼 따라가지 못하는 다리 사이의 간격이 끝도 없이 멀어지면 허리는 점점 굽어지고, 결국 발 떼는 것 자체가 어려워진다. 계속 걷기 위해서는 멀리 앞서 간 손을 중심으로 발을 끌어당길 게 아니라, 내 발이 위치한 곳을 중심으로 손을 당겨 허리를 곧게 펴야 한다. 그래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힘이 난다. 멀리 내다보되, 지금 발 딛는 곳이 어디인지를 명확히 알아야 꾸준히 운동할 힘이 생기는 것이다.
스스로를 과신하며,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고 여기며 꾸린 계획, 목적, 당위들이 똘똘 뭉쳐 내안의 나를 만든다. 어느 순간 그 상상속의 나와 현실의 나 사이의 괴리를 느낄 때 자괴감과 우울감에 사로잡힌다. 내가 나를 잘 알고, 나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의 반복이 있다. 그런 기대들이 나를 증명하지 않는다는 걸 되새기며 마음을 비우려 애쓰지만, 그 애씀에도 ‘힘’이 필요하다. 아니, 어쩌면 힘을 빼는 '힘'이 필요한 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