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자이기도 한데, 여자니까"
친구가 물었다. “산호 이야기를 누가 궁금해해?”산호의 인생이 모두의 이목을 끌만큼 성공적이거나 매력적인 이야기는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중요한 ‘참조’가 되리라 믿는다. 그 누군가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을 수 있다. 참조점이 없는 삶은 어떤 삶인가. '나는 누구인가?' 하며 매 순간 닥치는 혼란, 혼자라는 두려움, 내가 아닌 나를 연기해야 하는 분리감. 그 모든 걸 견디는 삶이다. 산호 또한 성장 과정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남자인지 혹은 여자인지) 확신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둘러싸여 있었다. 세상은 온통 약속이라도 한 듯 세상이 정해준 성별대로 사는 이들의 이야기로 가득했다. “실제로는 선택적이며, 아주 축소된 경험의 영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이라 주장하는”*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산호의 이야기를 참조한다는 말은 그의 삶을 따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참조(參照)한다는 것은, 이 세계에 참(參)여하고 있는 존재로 자신을 조(照)명하기 시작한다는 의미다. 그건 내가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는 발견이며, 자신의 경험을 믿기 시작하는 계기이자,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는 신호이다.
성공, 실패란 단어에 다 담지 못할 만큼 산호의 삶은 복잡하다. ‘FTM'이란 정체성은 중요한 이슈지만, 그것으로 그의 삶을 단순화할 수 없다. 그라고 해서 '트랜스젠더'란 단어를 손에 쥐고 태어나진 않았다. 누구라도 그러하듯 그의 욕망은 하나가 아니고, 때로 충돌한다. 그의 목소리에서 드러나는 모순은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혹은 아니라는) 증거가 아니라, 그가 살아 숨 쉬는 존재라는 증거다. 누군가는 멈춰서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것이다.
* 존 버거, <본다는 것의 의미>
1988년,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대구의 밤은 자정이 넘도록 삼십 도를 웃돌았다. 산호 엄마는 만삭의 몸으로 시댁이 있는 대구를 향했다. 살고 있던 수원에는 첫째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었다. 출산일이 가까워오자 더위가 한풀 꺾였다. 입추였다. 소나기가 쏟아지던 어느 날 오후, 산호가 첫울음을 냈다. 아이는 머리숱이 많고, 까맸다. 간호사는 폴라로이드 사진에 그 모습을 담아 파란 매직으로 날짜와 몸무게 그리고 "여성"이라는 기호를 새겼다.
"어릴 때요? 음...전 어릴 때 크면 ‘엄마’ 되고 싶다 그랬어요. 어릴 때는 제가 엄마를 많이 좋아했거든요. 일단 엄마가 예뻐서 좋았어요. 학예회 같은 걸 하면 엄마가 오잖아요. 그럼 우리 엄마가 제일 예쁜 거예요. 되게 뿌듯했어요. 어릴 때 엄마가 피자집을 했어요. 하루는 “친구들이 엄마 되게 예쁘대”라고 말했더니 “뭐 하나라도 줘야겠네” 해서 진짜 데리고 갔어요. 근데 엄마가 안 줬어요. (웃음) 친구들한테 미안했죠. 엄마가 엄청 아꼈어요. 집이 피자집, 치킨집인데 먹어본 적이 없어요. 그냥 튀김 껍질 남은 거 주고 그랬어요. 맨날 양념 버무리고 있으면 옆에 가서 기다리고. 만약 달라고 말했으면 엄마도 해줬을 텐데, 제가 눈치를 많이 본 거 같아요. 엄마 배달 가고 없으면 장부를 봐요. 그러면 하루에 이만 원, 삼만 원 이렇게 적혀 있는 거예요. 돈 못 버는 걸 아니까 뭘 사달라는 말을 안 했죠. 초등학교 때 그래서 수학여행도 안 갔어요. 안 간다 그랬죠. 친구도 없고, 재미없을 거 같고, 집에 돈도 없고. 집에서 개랑 놀았어요.
그 외엔 어릴 때 별다른 기억이 없어요. 아빠 기억도 안 나고. 아빠는 저 한 살도 되기 전에 돌아가셨어요. 교통사고로. 막내 이모 약혼식 갔다가 술 마시고 운전을 했대요. 그때가 저 태어난 다음 해니까 아빠 기억이 없죠. 딱히 나한테 ‘아빠가 없다’ 그런 인식은 없었어요. 일곱 살 땐가. 엄마가 새아빠랑 결혼할 때 확 느낌이 왔죠. 그때 엄마가 재혼하겠다고 친가 가서 말했던 게 기억나요. 같이 갔거든요. 할아버지 앞에서 무릎 꿇고 앉아서 얘기하고. 그게 기억이 나요. 아빠 돌아가시고 친가에서 생활비를 받았는데, 할아버지가 “재혼할 거면 생활비는 안 주겠다” 했던 거 같아요.
엄마가 재혼하고 나서 충주에 피자집을 차렸어요. 그쪽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소개로. 새아빠는 배달하고, 엄마는 튀기고. 피자랑 치킨 합쳐서 구천 구백 원. 충주에서도 두 번 정도 이사 다닌 거 같아요. 이사 갔다 오니까 친구가 안 놀아주더라고요. 나중에 물어보니까 ‘또 네가 어디 갈까 봐 친해지기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한 살 터울 누나가 있었는데, 누나도 맨날 친구들하고 놀러 나가고. 어릴 때 많이 외로웠어요. 엄마도 피자집 때문에 정신없으니까 저한테 신경을 못 썼죠. 강아지들이 있어서 그나마 괜찮았던 거 같아요.
어릴 때부터 계속 ‘남자’라고는 했어요. 남동생 고추 떼어달라 그러고. 로봇 사달라 그러고. 근데 또 로봇 좋아하는 여자도 많으니까요. 친구들한테도 “난 남자야”라고 말했어요. 그러면 “어, 너 남자 해” 그러든지 말든지 했던 거 같아요. 어렸을 때는 남자, 여자 구분을 딱히 안 하잖아요. 어릴 때는 오히려 고민할 게 없었어요. 커가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여자였죠. 내가 신경 써주고 싶은 애가 있는데 여자애였죠. 사랑이란 것도 잘 몰랐고. 그냥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었죠. 근데 2차 성징이 오면서부터 달라졌어요.
나는 남자이기도 한데, 여자니까
아, 나는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가슴이 나오고, 생리도 하고, 교복 치마를 입어야 하고. 그때 혼란이 왔죠. 난 이렇게 살기 싫은데. 교복 치마 입는 거랑 가슴 나오는 것 때문에 그랬죠. 다행히 중1 때 다리가 부러져서 바지를 입게 됐거든요. 그 후로 다리가 나아도 바지를 계속 입었어요. 고등학교 올라가서도 주임 선생님한테 바지 입고 싶다고 말해서 계속 입었어요. 옷도 누나 옷 물려 입었는데 다행히 그때 누나가 힙합에 물들어서 큰 박스티랑 헐렁한 청바지를 입었어요. 그것 때문에 누나 옷 물려 입는 데 딱히 스트레스가 없었어요. 엄마가 제 옷을 안 사주셨어요. 맨날 누나 옷만 물려 입었어요. 누나는 시장 갔다 오면 가방 들고 오는 거예요. 옷 사 오는 거죠. 근데 내 옷은 없는 거죠. 그게 서러웠죠. 집에 돈 없는데 자꾸 사 오니까 저는 누나가 참 철없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2차 성징이 늦게 왔어요. 고2 때 생리했나 그랬던 거 같아요. 그전까지만 해도 누나를 놀렸어요. 오버하는 밤이라고. 오버나이트 생리대 찬다고요. 근데 나도 하게 됐죠. 처음 생리할 때는 화장실 가서 피 묻어 있어서 엄마를 불렀죠. 엄마가 생리하는 거라고 그랬죠. ‘그런가? 이게 생린가?’ 긴가민가하다가 가슴 나오고 변화가 시작되니까 그때부터 몸이 좀 싫었어요. 전 그냥 가슴 달린 거는 여성의 것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남성의 것으로 바꾸고 싶어서 절제를 한 거예요. 여성의 생식기인 자궁도 - 뭐 아직 생식기 수술을 하지 않았지만 - 그 여성성이 싫어서 제거하긴 했거든요. 달려 있으면 뭔가…. 어릴 때는 혼자 그런 생각을 하긴 했어요. 약하고 그랬기 때문에, 만약 성폭행을 당하면 임신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두려운 생각을 많이 했어요. 나는 남자이기도 한데, 여자니까 만약 강한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하면 임신할 수도 있잖아요. 그게 되게 싫었던 거 같아요. 여성의 생식기가 있어서 만약 성폭행을 당하면 되게 싫겠다. 성폭행당하면 어떡하지.
가슴이 나왔던 건 고등학교 때쯤인 거 같아요. 브래지어 하기가 싫더라고요. 누나가 맨날 하던 건데. 여자 속옷 하기 싫어서 한 번도 안 입었어요. 엄마가 스포츠 브라 사 와서 집에서 한 번 입어보긴 했는데, 그러고는 안 했어요. 엄마가 왜 안 입냐고 그래서 입기 싫다 그랬어요. 엄마도 그냥 “입어야지” 그러고 말았어요. 막 억지로 입히지는 않았어요. 팬티는 맨날 엄마가 사 온 꽃무늬 팬티 있잖아요. 한가운데 꼭 꽃이나 리본 달려 있는. (웃음) 그거 입다가 이십 대 초반부터 남자 팬티 사 입은 거 같아요. 다행히 가슴이 막 그렇게 큰 게 아니라서 고등학교 때는 그냥 티 하나만 입고 수그리고 다녔어요. 별로 티가 안 나니까. 근데 티는 났을 거예요. 나 혼자 티 안 난다고 생각했을지도. (웃음) 생리하면서 아프기 시작하면서 좀 짜증 났죠. 나는 남잔데 왜 여자로서 생식활동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갔죠. 그리고 고추가 갖고 싶어서 좀 싫었던 거. 그때까지만 해도 트랜스젠더라는 걸 잘 몰랐으니까 수술하고 그런 생각 없었어요. 아, 그냥 계속 브래지어 안 하고 다녀야지 그러고.
고등학교 때 하루는 좀 그래 가지고 제작해주는 데를 갔어요. 조끼 모양인데 면으로 꽉 가슴을 압박해주는 게 있거든요. 거기서 다 벗고 사이즈 재서 만들어왔어요. 근데 너무 갑갑하더라고요. 늘어나지 않는 면을 완전 꽉 맞게 해서 지퍼를 딱 올려버리는 거였어요. 숨을 못 쉬겠더라고요. 그래도 다들 평평한 이 앞 라인을 만들기 위해 하는 거죠. 맨날 수그리고 다녀도 앞에서 바람 한 번 불면 티가 나니까. 그래서 압박 붕대를 하고 다니다 자꾸 내려가서 하나 맞추러 갔죠. 그거 만들어 팔던 분이 FTM인데, 그 자리에서 드드득 바로 재봉틀 해서 만들어주더라고요. 근데 뛰질 못해요. 숨차. (웃음) 그래도 수술 안 됐을 때는 필요하죠. 두 개 맞췄는데 육만 원이었나. 좋았죠. 돈이 비싸드래도. 한 일, 이 년 했을 거예요. 여름에만 했어요. 겨울에서는 옷을 두껍게 입으니까. 그러다 살쪄서 그때부터 못 썼어요.
전 고민을 별로 안 한 편이에요. 생각은 했지만, 엄청 깊게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지, 나는 자살해야 돼’ 막 그런 정도는 아니었어요. 어릴 적에 제가 뭐 많은 생각을 하던 사람이 아니라서. 어릴 때는 그냥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그런 원망을 한 거 같아요. ‘신이 있다면 왜 나를 이렇게 만든 거지?’ 그런 생각도 많이 하고. 부모님이 성당 다녔거든요. 맨날 예수 욕하고 그랬어요. 저희 집에서 하느님 십자가 달려 있는 게 있었거든요. 그거 보면서 이팔저팔 했죠. (웃음) 왜 이렇게 태어나게 했냐고. 엄청 뭐라고. 근데 연애하면서 그런 생각을 안 하게 됐어요. 혼자 있으면 계속 그랬을지 모르겠는데, 고등학교 때 연애하면서 여자 친구랑 사이가 좋으니까 별로 고민 안 했던 거 같아요. 쉬는 텀(term, 기간) 없이 계속 연애를 많이 했던 거 같아요."
- 다음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