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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눈 Sep 01. 2017

바라던 바

 



괴로운 상황만 계속되지 않고, 행복하다고 여기는 상황만 지속되지도 않는다. 어떤 상황을 괴롭게 여기든, 행복하다고 여기든, 그 상태는 객관적 상황이기보다 상황을 마주하는 이의 자세와 가깝다. 상황을 그렇게 마주하는 모습에는 그렇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태도가 전제되어 있다. 그 태도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삶의 다양한 경험과 배경지식을 토대로 계열화된다. 그 계열화된 맥락이 언제 어떻게 어떤 사건들이 버무려져 내 안의 가치관으로 자리잡혔는지, 그 시간을 늘려 톺아보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이미 바쁘고, 앞으로도 바쁠 예정이며, 해야할 것들은 무수하게 쏟아지고 있다.


축적된 시간을 토대로 삶에서 무언가를 ‘선택’하거나, 스스로 선택했다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삶을 돌아보고 성찰할 틈은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지만, 그 틈을 어떻게 확보하고 선용하느냐는, 의지에 달렸다. 그 의지를 위한 틈을 만들라며, 채근하는 이들이 곁에 있었던가? 공동체적 삶을 찾게된 이유다. 혼자 완결 지으려는, 혼자 완결 지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그렇게 혼자 완결짓고 즐거운데서 오는 공허함을, 함께 만들고 그려가는 ‘과정’으로. 그 참맛을 보게 하는 과정으로 향한다.


<깊이에의 강요>라는 짧은 소설이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은 그림을 그리는 작가였는데, 한 신문사 기자가 ‘이 작가는 재능은 있으나, 깊이가 없다’라는 평을 한다. 그 문장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지 않던 작가는 남은 평생을 ‘깊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집착하다가 심각한 우울증에 걸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자기 밖의 한마디가 자신의 현실, 자기 안의 존재를 갈고리로 낚아채듯 끌려 다닌다. 작가는 ‘깊이’에 대해 주체적으로 고민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런 상태에 ‘깊이’ 빠져 있다. 기자는 자신의 글에서 ‘깊이’가 무엇인지 따로 설명하지 않지만, 작가는 깊이라는 어떤 ‘상’에 저당 잡혀 자신의 현실을 부단히 괴롭게 한다. 남의 평가, 나의 문장, 남의 기대에 사로잡혀 남은 날을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보낸 삶이다. 깊이 없는 그림을, 깊이 없는 자신으로 여기는 불행이다.


그렇게 살고싶지 않아서 마을에서 살기로 결심했는데, 여전히 사람들을 눈치보고 있고, 내 실제와 생활, 속마음보다 과대평가되는 안정감, 차분함, 책임감, 따위의 말들이 나를 더 옭아맨다. 그런 칭찬과 인정 한마디로 실제 나를 몰라서 그런다며 한숨을 쉬거나, 순간 반짝거리는 흐뭇함을 느낄 때 스스로가 참 가볍게 느껴진다. 실제 삶의 변화 없이 사람들의 말에 일희일비하는, 결국 내가 아는 나를 다시 확인하는 것에 그칠 뿐인, 스스로를 복잡하게 만드는 모양이다. 누구로부터 규정받지 않아도, 규정받아도 상관없는 존재로 살고 싶다. 내가 보는 만큼, 듣는 만큼, 느끼는 만큼만 말하며 살고 싶다. 슬픔, 고통, 원망, 우울, 없는 척하거나 내 것이 아닌 듯 점잖은 척 하지 않고, 어떤 감정이든 드러내며 살고 싶다. 내 솔직한 이면과 진실을 물타기하는 당위, 관념, 상처, 과거에 매몰되지 않고 담백하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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