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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밤 Mar 18. 2016

EF소나타

엄마를 다 안다고 생각했다

새하얀 EF소나타가 우리 집에 온 건 1999년이었다. 온 국민의 살림이 카드빚으로 망가지던 90년대 후반, 우리 집도 매한가지였다. 난 매일 밤 카드 얘기로 싸우는 엄마, 아빠가 이제 더 대놓고 싸우겠구나 하는 생각에 넌더리가 났다. 엄마는 왜 하필 소형차도 아닌 중형차를 뺐을까. 지난 17년간 난 그 질문 언저리를 맴돌았다. 엄마는 왜. 엄마를 향한 내 마음속 원망은 모두 그때 왜 차를 사서로 끝이 났다.

EF소나타가 우리 집에 온 지 한 달 정도 지났을까. 가족끼리 사철탕 집에서 외식을 했다. 허름한 가게에는 아빠가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는 차를 가게 멀리 세웠다. 동생과 나는 애써 타고 온 차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야 했다. 나와 동생은 개고기에 손도 대지 않았다. 행여 젓가락 하나 만지지 않았다. 그게 집에 있는 강아지에 대한 최소한의 의리였고 윤리였다. 그저 같이 키우던 엄마가 맛있게 개고기를 먹는 걸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원망스러웠던 건, 아빠 몰래 우리가 타고 온 EF소나타였다.

EF소나타가 우리 집에 온 건, 우리 집의 경제 형편이 나락으로 떨어지고도 한참 뒤였다. 엄마도 아빠도 왜 갑자기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가 왜 아파트에서 반지하, 반지하에서 컨테이너로 이사 가야 하는지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게 엄마, 아빠가 우리를 지키는 나름의 방법이었을까.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난 밤에 엄마, 아빠가 나누는 이야기에 귀를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해 우리 집 수도가 끊겼다. 무허가 건물이라 근처 목욕탕 수도를 끌어다 쓰고 있었는데, 그 목욕탕이 부도가 난 것이었다. 수도세만 몇백만 원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엄마는 옆집에 사정, 사정해 호스를 하나 연결해 왔다. 옆집에서 툭하면 그 수도를 잠갔으므로 엄마가 사정하는 일도 반복됐다. 끌어온 물을 받아 들통에 끓여 씻는 날이 반복됐다. 나는 점점 씻기를 싫어하는 아이가 됐다.

엄만 나한테 잘 씻으라고 했고, 난 늘 그러겠다 했다. 나는 일 나가는 엄마가 아침마다 호스를 끌어와 물을 끓여대는 게 무섭고, 머리를 감으려 목을 숙일 때마다 욕실 바닥 깨진 사이로 쥐가 오가는 걸 보는 게 싫다고 말하지 못했다. 엄마가 속상해할 것이 뻔했고, 엄마가 속상해서 내가 속상할 게 싫었다. 아침이면 씻기 싫어 눈 뜨기가 싫었다.

컨테이너 집은 해가 갈수록 망가져 갔다. 집이 망가지는 건 쥐 때문이었다. 쥐는 천장부터 바닥까지 모든 곳을 갉아먹으며 들어왔다. 집에서 쥐를 보는 날이면 난 집을 나와 맴돌았다. 죄책감과 함께 한참을 서성였다. 그것을 처리해야 하는 것이 엄마였으므로.

그렇지만 엄마는 내게 한 번도 힘든 얘기를 하지 않았다. 대신 엄마는 일 끝내고 돌아온 매일 새벽 내가 태어나던 때의 이야기를 했다. 큰 병원, 조기출산, 제왕절개, 인큐베이터. 수도 없이 반복되는 이야기를 매일 밤 들으면서 난 엄마의 괴로움을 겨우 짐작했다. 엄마가 식당에 나갔었다는 것도, 얼마 전 호프집을 개업했다는 것도 난 짐작으로 알았다. 그때부터 난 100원도 아꼈다. 친구들이 가자는 H.O.T 콘서트도, 놀이공원도 가지 않았다. 돈을 벌 수 없던 내가 엄마의 괴로움을 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돈 안 드는 딸이 되는 것이었다.

돈 안 드는 딸은 머리가 클수록 엄마의 소비에 간섭했다. 과일 너무 많이 사 오지 마라, 보일러는 웬만하면 틀지 말자, 그건 또 왜 샀냐. 엄마는 내 말을 들어주질 않았다. 음식은 좋은 걸 먹어야 한다. 춥다. 필요하니까 샀다. 모녀의 대화는 늘 반복됐다. 오랫동안 혼자서 난 불을 끄고, 보일러를 끄고, 돈을 아끼고, 먹고 싶고, 갖고 싶은 걸 참아가면서 내가 생각한 올바른 딸 노릇을 했다. 오랫동안 나에게 가난은 같이 나눌 수 없는 엄마의 괴로움이었고, 날 괴롭히는 엄마의 모순이자, 표현할 수 없이 커져만 가는 엄마에 대한 원망이었다. 어느새 엄마는 내게 가난의 징표이자 원인이 돼 있었다. 난 매일 엄마를 미워하는 죄책감에 몸서리치면서 모든 감정을 중형차에 쏟아부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왜 하필 그때였냐고. 왜 하필 중형차였냐고.

내가 엄마한테 그 질문을 하게 된 건, 서른이 넘어서였다. 구술 작업을 하며 만난 할머니 한 분이 어느 날 집에 비가 샌다고 전화를 했다. 어릴 때 우리 집에도 비가 샜다. 혼자 집에서 바닥에 새 나오는 물을 반찬통으로 퍼 나르며 울었던 기억에 사방팔방으로 나서 할머니를 도왔다. 할머니는 어느 날 딤플이라 적힌 양주 한 명을 내게 건넸다. 그거 말고도 몇 병이 더 있었다. 나는 빚에 쫓겨 서울에 왔다고, 먹고 죽을래도 돈이 없다고 하던 할머니를 다시 훑어봤다. 좁은 방안 가득 찬 큰 냉장고도. 조용히 나와 한참을 씩씩댔는데 갑자기 엉뚱한 울분이 터졌다. 가난한 사람은 양주도 사면 안 된단 말인가.

그때쯤이었다. 엄마한테 처음으로 물어본 게. 난 17년 만에 그 답을 들었다. 엄마가 차를 산 건 호프집을 시작한 다음이었다. 짐작으로 난 알고 있었다. 술 먹은 사람들의 행패를, 그 수모를 엄마가 어떻게 겪고 있는지. 가끔 경찰서 얘기를 듣기도 했었다. 엄마는 가게 앞에 EF소나타를 타고 내리면, "사장님, 이런 일 하실 분이 아닌데"하는 말을 듣는 게 좋았다고 했다. 그 차를 타면 엄마는 신기하게도 새까맣게 잊을 수 있었다고 했다. 수도가 끊긴 집도, 쌓여가는 빚도, 오늘 겪게 될 수모도, 모두.


다 안다고, 엄마가 왜 그러는지, 원하는 게 뭔지 다 안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그러는 건 미련해서라고 생각했다. 나라면 더 잘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엄마가 산 모든 물건들은 엄마를 위한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그제야 난 알았다. 가난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던 내가 사실은 비난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단 것을. 엄마의 EF소나타처럼 좁은 방구석에 놓인 할머니의 큰 TV를 미워하고. 수급비 30만 원 받는다던 한 할아버지의 소주 가득한 검은 봉다리를 증오하고. 없는 살림에 유니세프에 매달 3만 원씩 보낸다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외로워서 화분을 100개가 넘게 키운다는 사람의 말을 듣지 못하고. 그 화분만, 화분만 얼마일지를 생각했다. 왜 그렇게 비합리적인 소비를 하냐고. 우리 엄마처럼 다들 미련하다고. 나는 그렇게 더, 더 내가 합리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가난을 찾아 헤맸다.


그제야 난 알았다. 내가 찾는 합리적인 가난은 세상에 없음을. 사실은 갑자기 찾아든 가난에 엄마도 흔들렸다는 것을. 그녀도 매일 무너지는 자존을 매번 다시 일으켜 세우며 살아왔음을. 흔들리지 않으려고, 흔들렸음을. 흔들려 덜 흔들렸음을. 그 흔들림 속에 그녀가 계속 서 있었음을. 자기가 할 수 있던 최선의 중심을 잡던 사람들을 나는 흔들린다고 미워하고 원망했다. 그 중심에 서서 혼자 흔들리던 사람들을, 나는 보질 못하고.*

그날 이후로 난, 엄마를 인터뷰하겠다고 따라다녔다. 엄마랑 이제 열여섯이 넘어가는 EF소나타를 타고, 가슴 졸이며 비싼 밥도 먹고, 차를 마시며 엄마의 과거를 물었다. 엄마는 꽤나 귀찮아하고, 언제 끝나냐 계속 물었지만, 난 벅찼다. 엄마를 알아간다는 게, 즐거웠다. EF소나타만큼 무거웠던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것 같아 후련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엄마를 원망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그래서 스스로를 더는 추궁하지 않아도 되는 게 좋았다.

그렇게 엄마와 많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올겨울, 보일러를 끄고 돌아서는 나를 동생이 부른다. "언니, 엄마가 다 같이 집에 있는데 나한테만 카톡 보내는 거 알아?", "뭐라고?", "우리 봄밤 몰래 보일러 좀 틀자." 여전히 나는 좀 못됐다.





* 함민복, <흔들린다> ‘나무는 최선을 다해 중심을 잡고 있었구나 / 가지 하나 이파리 하나하나 까지 /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렸었구나 / 흔들려 덜 흔들렸구나 /흔들림의 중심에 나무는 서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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