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자랑이었던 것들

‘전지적 엄마 친구 시점’을 넘어

by 봄밤

어린 시절, 난 특공대였다. 학교가 끝나면 공사장 모래가 수북이 쌓인 공터로 향했다. 해질 무렵까지 특공대 친구들과 모래산에 뛰어오르고, 보이는 절벽마다 올라탔다. 그네 높이 타기 시합을 하다 놀이터 모래바닥으로 날아가 곧꾸라진 친구도 있었다. 어떤 애는 특공대를 외치며 라면 수프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내 배에는 절벽을 오르다 미끄러져서 생긴 흉터가 흐릿하게 남아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반지하로 이사했을 때 내가 대문이 아닌 창문으로 넘어 들어간 건 당연했다. 나는 특공대였다.


엄마 심부름으로 고무장갑을 사 오던 길이었다. 눈 여겨봤던 베란다 창을 넘어 집으로 들어갔다. 한달음에 달려가 엄마에게 외쳤다. “엄마, 나 어디로 들어왔는지 알아?” 담소 중이었던 동네 아주머니 서넛과 엄마는 날 빤히 쳐다봤다. 당황한 엄마는 “쟤가 왜 안 하던 짓을 해”라며 말끝을 흐렸고, 아주머니들은 폭소를 터트렸다. 한 아주머니가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여자애가 왜 그렇게 남자애 같니?”


엄마의 민망해하는 눈빛을 보며 나는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그 뒤로도 “남자 같다”는 말은 나를 늘 따라다녔다. 그저 길을 걸었을 뿐인데 친구들은 내 팔자걸음이 “남자 같다”라고 했고, 중학교 내내 내 별명은 ‘터프걸’이었다. 집에 걸려온 전화를 받으면 엄마 친구들은 “아들이냐?”라고 물어봤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여자다운 걸음걸이와 목소리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고, 안다 해도 따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나에 비해 엄마는 “천생 여자”라는 말을 들었다. 긴 생머리에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린 블라우스와 꽃무늬 치마를 즐겨 입었다. 립밤 한 번 바르지 않는 나와 달리 엄마의 입술은 늘 빨갰다. 집은 엄마의 옷으로 넘쳐났다.


우리 집이 반지하에서 컨테이너집으로 옮기며 가난해질수록 엄마의 옷은 더 화려해졌다. 좁은 집에 어울리지 않는 대형 TV와 스탠드 에어컨을 사들였고, 중형차도 뽑았다. 엄마는 밤마다 내게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성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성공보다는 무시라는 단어를 헤아렸다. 오늘 엄마를 무시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알만한 얼굴들을 떠올리다 잠이 들곤 했다.


그런 내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걸 알아차렸을 땐 감당하기 힘든 비밀을 혼자 떠안은 기분이었다. 좋아하는 여자 친구 앞에 설 때면 설레고 좋으면서도, 무시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아주머니들의 웃음소리가 귓전을 때렸고 엄마를 똑바로 바라보는 게 미안했다. 내가 학원을 빼먹고 놀이터에서 그네만 타도 엄마 귀에 들어가는 동네였다. 이십 대 후반 여자 친구와 처음 모텔을 갈 때도 날 괴롭힌 건 ‘엄마 친구’들의 시선이었다. 혹여나 누군가 날 발견해 웅성거린다면? 고향에서 40km 떨어진 낯선 모텔 입구에서도 그들을 떨쳐내지 못했다.


삼십 대가 되며 동네를 떠났다. 동성 애인을 만났고, 안전한 사람들을 골라 커밍아웃도 했다. 독립 이후 제법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 그 평화를 흔드는 일이 생겼다. 레즈비언의 일상을 글로 연재할 기회가 생겼는데 선뜻 나설 수 없었다. 편집자는 내가 누구인지 노출되지 않게 할 수 있다고 했지만, 나는 불안했다. 혹시 누군가 날 알아본다면? 어릴 적 동네 친구들, 사촌 오빠, 부모님의 친구들까지. 발각되면 끝장이다. 엄마가 아는 것과 엄마 친구도 아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나는 여전히 ‘전지적 엄마 친구 시점’을 놓지 못한다.


나의 오랜 수치심의 정체를 뜯어보다가 내 생각은 26년 전 그 반지하 집까지 갔다. 창문을 넘어 아주머니들의 웃음을 마주한 뒤로는 남자 같은 내 말투와 몸짓, 목소리가 신경 쓰였다. 언젠가부터 말을 아꼈고, 움직임도 최소화했다. 중학교 때는 친구들이 한창 같이 놀다가 조용히 있던 나를 발견하고 “너도 같이 있었네”하며 웃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어김없이 나는 교실에서, 길에서, 가족모임에서 “남자 같다”는 말을 들었고, 그때마다 수치심으로 몸 둘 바를 몰랐다. 사실 남자 같든, 여자 같든 나는 별 상관이 없었다. 그게 그저 나였으니까. 하지만 그게 그저 나였기에, 사람들의 웃음 속에서 오래 외로웠다.


서른이 넘어서도 두려운 일 베스트 오브 베스트는 엄마가 아니라 엄마 친구들이 내가 동성애자라는 걸 아는 일이다. ‘비정상’인 딸 때문에 입방아에 시달릴 엄마를 생각하면 상상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하다. 언젠가 아이를 남자, 여자로 규정짓지 않고 키우는 부부를 만난 적이 있다. 세 살 남짓한 아이는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왔고, 편해 보이는 헐렁한 티셔츠와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맘때 사진 속 어린 나는 늘 양갈래로 땋은 머리에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다.) 아이가 자신의 성별을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는 부부 이야기를 듣자, 이상하게 내가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그날 아주머니들이 창문을 넘어온 내게 “용감하다”, “어떻게 창문을 넘을 생각을 했어”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으쓱해진 나는 친구들에게도 자랑했겠지. 특공대원들과 창문을 넘어 우리 집에서 비밀모임을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내가 엄마를 찾아가 자랑하는 모습. “엄마, 내가 누굴 좋아하게 됐는지 알아?" 이제는 되찾고 싶은 내게 자랑이었던 것들.




쌀을 씻다가

창 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황인찬, <무화과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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