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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밤 Feb 20. 2023

“현장실습생이 죽었다는 뉴스를 보고도

그게 나라는 걸 몰랐어“

- 16년 전 현장실습생 이민경(가명) 인터뷰


2007년, 동생은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그는 이력서의 학력란을 비워두는 사람이 되었다. 한 번은 내 친구가 동생에게 “전공이 뭐예요?”라고 물었다. 동생이 얼굴을 붉히며 “대학 안 다니는데요.”라고 말하자 친구의 얼굴도 달아올랐다. 사람들은 이십 대 초반이던 동생을 당연히 대학생일 거라 여겼다. 서른 중반이 넘은 지금도 전공이나 학번, MT, 조별 과제 이야기가 나오면 입을 꾹 다문다.


“모르는 얘기니까 낄 수가 없잖아. 사람들이 웃으면 그냥 나도 따라 웃는 거야. 이십 대 내내 고졸인 걸 들키면 사람들이 날 다르게 볼까 봐 대학 얘기만 나와도 뜨끔했어.”


“누가 상고에 갈 성적인지, 인문계에 갈 인물인지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보인다”는 선생님 말에 따라 동생은 상고에 진학했다. 3학년 1학기 말이 되자 친구들이 하나둘 취업을 나갔다. 애들이 반쯤 빠져나가자 선생님들은 수업을 하지 않고 자율학습을 했다. 카드 게임을 가르쳐주는 선생님도 있었다. 자리가 비어갈 때마다 낙오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취업할 생각이 없었는데, 점점 어디라도 가고 싶어졌다. 그때 경북 디스플레이 공장의 생산직 자리가 나왔다.


“선생님이 남은 애들 모아놓고 ‘진짜 어렵게 구한 자리다. 여기 아니면 너네 보낼 데 없다. 마지막 기회야.’라면서 위기감을 주더라고. 부모님은 가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무조건 간다고 했어. 이대로 졸업하면 학교도, 선생님도, 친구도 없이 나 혼자 해나가야 한다는 게 무서웠거든.”


전세 버스를 타고 경기도에서 경상북도로 갔다. 버스는 지역 곳곳을 돌며 19살의 또래 친구들을 태웠다.


“버스가 지역마다 돌면서 애들을 태우잖아. 그럼 전국에 있는 날라리 애들이 다 타는 거야.(웃음) 기싸움이 시작되는 거지. 초장에 잡아야 되니까. 다른 학교 애들이 타면 인사도 안 하고 쓱 내리깔아 보는 거야. 사실 같은 학교에서 온 애들도 3년 내내 말 한마디 안 섞던 애들인데 이제 걔네밖에 없잖아. 갑자기 학연이 중요해지는 거지.(웃음)”


오리엔테이션은 대강당에서 진행됐다. 떠들지 마라, 졸지 마라, 의자에 머리 기대지 마라. “뭐가 됐든 다 하지 말라는 말”로 점철된 시간이었다. 동생은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가 불호령과 함께 뒤로 불려 나갔다. 집중 안 한다며 마이크를 던져 깨뜨린 강사도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어벙벙했다. 300명쯤 되는 아이들이 머리를 바짝 세우고 앉아 졸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 서로 깨워주자며 약속도 했다. 다음 날은 이론 교육을 받고 시험을 봤다. 영어로 된 낯선 디스플레이 생산품 이름을 외웠다. 시험에 떨어진 아이들은 짐을 싸서 집에 가야 했고, 매일 환송회가 열렸다. 나도 떨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과 그 애가 떨어져 내가 붙었다는 안도감에 혼란스러웠다. 아이들이 반쯤 집으로 돌아갈 즈음 라인 배정이 시작됐다.


“생산 라인에 가면 방진복을 입어야 하니까 다들 검수 라인에 가고 싶어 했어. 한 번 입으면 벗기가 힘드니까 화장실도 못 간다고, 만약 술 마시고 토하면 토 냄새 그대로 맡으면서 일해야 한다는 얘기가 돌았어.”


동생은 운 좋게 검수 라인이 됐다.


“검수팀은 종일 모니터 앞에 앉아서 하얀색, 검은색, 파란색 바뀔 때마다 불량을 잡아내거든. 눈 나가는(망가지는) 거지. 무결점 모니터가 사람 눈 다 망가뜨리면서 만드는 거야.”


근무는 3교대. 새벽 근무가 끝나는 날 아침 6시에는 삼겹살을 먹으며 회식을 했다. 그때마다 신입사원들은 조를 짜서 연습한 장기자랑을 선보여야 했다.


“잠도 못 자고 연습해서 춤추면 이따위로 해왔냐고, 죽고 싶냐고 선배들이 길길이 날뛰었어. 선배들이라고 해봐야 고작 이십 대 중반이야. 근데도 90도 각도로 깍듯이 인사하라고 시키는 거야. 회식할 때는 예쁜 애들 있으면 직급 있는 남자 옆에 앉히고. 더러웠지. 그때 처음으로 여긴 있을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어. 아무도 제지해주지 않았거든. 그때 가까이 앉은 애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공장에 나가기 전에 어떤 지시를 거부할 수 있는지 혹은 거부해야 하는지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어.”


평생 해보지 않았던 일을 하루종일 앉아서 하니 한 달 만에 허리가 나갔다.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데, 기숙사 친구들은 명절이라고 다 집으로 떠났다. 엉엉 울다 아빠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 길로 온 가족이 공장으로 달려왔다.


“처음에는 잠깐 집에 다녀올 생각이었어. 근데 차에 딱 탔을 때 긴장이 탁 풀리면서 안심이 되는 거야. 엄마가 운전하고, 아빠는 조수석에 있고, 네가 내 옆에 있고. 차 문을 닫자마자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란 걸 알았어. 돌아와서 딱 한 달은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더라. 그제야 엄청 긴장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거야. 다시는 생산직에 가고 싶지 않았어. 사무직이 너무 하고 싶었어. 사람 대우를 받고 싶어서. 작은 회사에 경리 자리가 나올 때마다 지원했는데 면접 볼 때마다 떨어졌어. 공부를 더 해야 하는구나 싶어서 스물세 살에 재수학원에 갔어. 근데 나만 나이가 많잖아. 외롭더라. 자는데 아무도 안 깨워줘서 빈 교실에서 일어난 적도 많아. 기본기가 없으니까 수업도 못 알아듣겠고. 결국 그만뒀지. 양식 조리도 배워보고, 공무원 시험 준비도 해보고, 공공근로도 해보고 하다 하다 안되니까 집에 틀어박혀 버린 거야.”


스물넷, 동생은 1년 넘게 방에서 나오지 않고 술만 마셨다. 한 번은 대낮에 취해 있는 동생을 보고 화가 난 내가 말했다. “너 너무 한심한 거 알지? 나가서 알바라도 해.” 소리치는 내게 동생이 힘없이 말했다. “언니, 언니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알아? 알면 얘기 좀 해줘.” 나는 동생이 그때 경리로 취업하려고 면접을 보러 다녔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마저도 계속 낙방해 낙담하고 있었다는 것도. 내게 그저 동생은 공무원 시험도, 재수학원도, 양식 조리사도 쉽게 포기하는 한심한 아이였다.


“그때는 가망이 없어 보였어. 뭐라도 열심히 하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야. 괴로웠어. 이것저것 찾아보고 면접도 보고 공부도 하고 시도란 시도는 다 했는데 안 됐지. 공무원 시험은 아무나 보나. 공부를 해봤어야지.”


방에서라도 나오면 좋겠다 싶어 동생을 내가 일하는 연극단체 뒤풀이에 불렀다. 동생은 그 술자리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들을 처음 만났다. 나중에는 나보다 동료들과 친해졌고, 무급이었지만 연극배우로도 참여했다. 그리고 얼마 뒤 수연(가명)이라는 극단 동료의 소개로 문화예술단체의 면접을 봤다. 결과는 낙방이었다.


“아, 나는 결국 이렇게 안 되는구나 절망하고 있는데 수연이 날 불러서 술을 사주는 거야. 그러면서 다시 준비하면 된다고 날 다독였어. 그때 처음 알았어. 준비해서 또 할 수도 있구나. 그전까지는 떨어진 회사를 준비해서 또 갈 수 있다는 생각을 못했거든. 난 늘 혼자 떨어지고 얘기할 사람이 없었으니까. 근데 누군가 나를 떨어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첫 시도를 해본 사람으로 봐주는 게 좋았어. 위로가 아니라 응원을 해주고, 다음을 같이 얘기해 준다는 게. 나는 그 순간을 잊지 못해. “


수연의 말대로 동생은 1년 뒤 비정규직으로 그 단체에 입사했다. 그 일을 물꼬로 동생은 문화기획 판에서 이력을 쌓았다. 기획서 쓰는 법을 몰라 선배들이 쓴 기획서를 들고 다니며 지하철에서 읽고 또 읽으면서. 회의에서 한두 마디 하기 위해 하고 싶은 말을 한 시간 넘게 쓰고 지우면서. 그리고 3년 전, 학력을 기재하지 않는 블라인드 채용을 통해 한 공공기관의 직원이 됐다.


“블라인드 채용인데도 이력서에 전공란이 있더라고. 나는 전공이 트라우마야. 그걸 말하려면 내가 대학 안 나온 걸 말해야 하니까. 근데 내가 그 칸을 비우고 제출해서 다들 내가 대안학교를 나온 줄 알았다는 거야.(웃음)”


처음 현장 실습 경험을 인터뷰하고 싶다고 했을 때, 동생은 말했다. “그 얘기하고 싶지 않은데.” 설득 끝에 만난 그는 세 시간 동안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리고 말했다. “이십 대 내내 내가 괴로웠던 이유를 알았어.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아무 경력 없는 고졸인 내가 사람 대우를 받는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다는 걸 알아서였어.” 동생은 자신이 정규직이 되어서 삶이 바뀐 게 아니라 이제는 대학이 아니라도 자신의 이력에 대해 할 말이 생겼다는 게 달라진 거 같다고 말했다. “이제 누가 전공을 물어보면 남들이 대학에 다니던 시기에 난 뭘 했고, 무엇에 관심이 있었는지 말해. 전공을 묻는 것도 결국 내가 누구인지 궁금한 거잖아.” 그때 힘든 시간을 통과하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물으니 무슨 얘기도 소용이 없다며 웃는다. 그냥 곁에 있어 주고 싶다고. 자꾸 끌어내서 한강도 가고 영화도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다.


“오랫동안 상고를 나왔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묻고 살았어. 그러면서 나조차 잊고 지냈던 거야. 내가 그 현장실습생이었다는 걸. 네가 현장실습 나갔던 경험을 들려달라고 했을 때야 알았어.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은유)이란 책이 나오고, 현장실습생이 죽었다는 뉴스를 보고도 그게 나라는 걸 몰랐거든. 그게 나라는 걸 알고 나니까 편의점에서 일하는 사람을 봐도, 옷 가게 매장 점원을 봐도 다 나 같았어. 일하는 사람한테 막 대하는 사람들은 그게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혀 못하는 거야. 나는 그게 다 나 같아. 젊은 나이에 고깃집에서 알바를 하는 것도 나고, 시청에서 공공근로를 하는 것도 나고, 공장에서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도 나고, 다 나였어.”




* 제목 이미지는 영화 <다음 소희>의 한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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