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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밤 Dec 14. 2022

공무원이던 아빠가 황토집을 지었다

아빠의 애창곡은 박상규의 <조약돌>. 취할 때마다 얼마나 불러댔으면 나도 줄줄 외운다. “내 마음은 조약돌 / 비바람에 시달려도 / 둥글게 살아가리 / 아무도 모르게.” 하지만 내가 아는 그는 적어도 둥글게 사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무도 모르게는 더더욱.


아빠가 일했던 면사무소(공무원은 5년마다 순환 근무를 한다)에 공공근로로 일하러 갔을 때, 아빠의 옛 동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꼿꼿한 사람”이라고. 어느 날 회식 자리에 시장이 와서 술을 따랐는데 남들 다 반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받을 때, 혼자만 양반다리로 앉아서 한 손으로 술을 받았다고 한다. 그 뒤로는 모두가 앉아서 술을 받았다. 그 얘길 전하자 아빠는 말했다. “시장이 뭐라고.” 그가 만년 계장인 비결이랄까. 그런 그가 “비바람에 시달려 둥글어진 조약돌”에 감정 이입을 한다니.


1956년, 경기도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내리 잠만 자는 천생이 태평한 아이였다. 농사일을 도우라는 어머니의 잔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지런히 먹고 잤다. 그렇게 만든 뱃살이 예순여섯인 지금까지 볼록하다. 고3 때까지 같은 생활을 반복하다 졸업을 3개월 앞두고 형을 따라 떠밀리듯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형제가 열이었고, 농사짓는 부모는 그 자식들을 먹여 살릴 재간이 없었다. 그는 그때 외운 국사 교과서를 아직도 술술 읊는다. 열아홉의 그는 알았을까. 면사무소에 32년을 출근하게 될 줄.


내 기억에 아빠가 가장 싫어하던 말은 “내가 낸 세금으로 월급 받는 것들이~”로 시작하는 레퍼토리다. 한 번은 제빵 회사에 다니는 작은 아빠가 그 말로 운을 떼자 아빠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세금 나도 낸다. 너는 내가 사 먹은 빵으로 월급 받지 않냐? 다 똑같은 거야. 남의 돈으로 먹고사는 건.” 왁자지껄했던 술자리가 순간 조용해졌다. “철밥통”이라는 말이 나올 때도 아빠의 표정은 구겨졌다. “너네만 잘리냐? 공무원도 잘리고, 그만두기도 해.” 아빠는 그런 납작한 말들에 눌리는 것을 거부했다. 그런 아빠를 보고 자라서일까. 누군가 공무원을 욕하며 “내가 낸 세금이 아깝다” 할 때마다, 댓글 창에 “철밥통” 운운하는 분노의 글들을 볼 때마다 나는 아무개로 퉁쳐지는 그냥 공무원이 아닌 아빠처럼 자기만의 이름과 감정을 지닌 사람들이 떠올랐다.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상고를 졸업한 동생이 생산직으로 취직해 멀리 경상도로 떠났다. 동생을 유일하게 말린 건 아빠였다. 그는 지금은 그 길밖에 안 보이겠지만, 반드시 다른 길이 있다고, 아니 그냥 집에서 놀아도 된다고 말렸다. 대학교에 처음 가 술 마시기 바빴던 나는 그런 아빠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건 그냥 동생의 삶이었다. 다른 길? 면사무소에서 주민등록등본을 떼는 일을 30년 동안 한 아빠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어색한 단어였다. 동생이 떠난 한 달 동안 그는 언제나처럼 매일 술을 마셨고, 언제나와 다르게 매일 울었다. 그것도 매번 내 앞에서.


나는 마흔아홉 살 먹은 아저씨의 눈물이 당황스러웠다. 동생을 끼고 살던 엄마의 덤덤함도, 의외로 매일 눈물 바람인 아빠의 애끓는 부정도 낯설었다. 돌아보니 그건 동생에 대한 사랑이기도 했지만, 아빠의 감정이입이기도 했다. 스무 살, 그래야 하는 줄만 알고 했던 어떤 선택이 평생을 지배하게 된,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십 대의 후회 같은 거. 그는 울면서 내게 말했다. “나도 꿈이 있었어.” (아빠, 멘트 너무 식상한데?) “그래, 아빠 꿈이 뭔데.” “아빠는 농부가 되는 게 꿈이었어.” (아빠 어릴 때 농사 안 짓고 잠만 잤다며. 갑자기 농부가 평생 꿈?) “그랬구나.” “근데 평생 남의 주민등록등본만 떼면서 살았어. 그게 평생 한이다.”


사실 아빠가 주민등록등본을 발급하는 일만 한 건 아니다. 아빠가 일하던 1990년대에는 침수가 잦았다. 그럴 때면 아빠는 한 달은 면사무소에서 먹고 자며 침수된 집들을 찾아가 흙을 퍼내고 살림살이들을 정리하는 수해복구에 투입됐다. 엄마는 갈아입을 아빠의 옷을 면사무소로 배달했다. 폭우가 쏟아져 온 동네가 물에 잠겼을 때, 그래서 엄마와 나, 동생이 반지하집을 탈출해 갈 곳 없이 길거리를 떠돌 때도 아빠는 비상근무를 나갔다. 사람들은 면사무소에 앉아 편히 일한다며 9급 공무원들을 싸잡아 욕했지만, 비나 눈이 많이 오는 날이면 난 아빠가 또 집에 못 오겠구나 싶었다.​


시도 때도 없이 호출되는 삶 속에서도 아빠는 숨 쉴 구멍을 만들었다. 마흔이 되던 해부터 출근하기 전, 할아버지가 묻힌 선산에 나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3년은 제대로 된 농작물이 나오지 않았다. 초보 농사꾼인 탓도 있지만, 본래 밭이 아닌 땅이라 돌을 골라내는 게 큰일이었다. 엄마는 그가 가져오는 벌레 먹은 상추와 배추, 오이 따위를 몰래 버리기 바빴다. 유기농이 대세가 되기 전까지.


16년 전, 쉰둘이 된 아빠는 내가 대학을 졸업하자 부양의 의무가 끝났다고 선언하며 명예퇴직을 했다. 그리고는 평일 아침과 주말에만 가던 밭에 집을 지었다. 집을 짓는다기에 포클레인 같은 중장비가 오려나 싶었는데, 어느 날 파란 봉고차가 와서 황토를 한가득 부어놓고 떠났다. 아빠는 그 황토를 벽돌로 하나하나 빚어 흙집을 지었다. 집이 완성되자 그는 친구들을 불러 모아 흙집이라 술이 안 취한다며 진탕 마셨다. (아빠 농부가 꿈이라며.)


흙집에 홀로 입주한 그는 본격적으로 농부의 삶을 시작했다. 전에는 못 보던 버섯 재배도 하고, 복숭아, 배 등 까다롭다는 과일나무도 심었다. 봄이면 이름도 알 수 없는 산나물을 캐다 먹었고, 여름에는 작물이 넘쳐나 수확하고 먹기만 해도 바빴고, 가을에는 고추 말리느라 외출도 못했다. 겨울에는 난로에 넣을 나무 구하기 바빴고, 역시 외출을 못 했다. 아빠는 산에 들어간 뒤로는 면도도, 이발도 하지 않았다. 만약 ‘나는 자연인이다’ 취재팀 눈에 띄었다면 반드시 출연 제의를 받았을 것이다. 엄마는 밥 먹을 때마다 수염에 음식이 묻는다며 진저리 쳤지만, 나는 그 정도 한풀이는 받아줄 만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삼십 년을 아침마다 면도했는데, 이 정도도 못 하냐.” 32년간 사회라는 틀에 맞추어 둥글게 깎였던 아빠는, 퇴직을 기점으로 빠른 속도로 (엄마 왈) “32년 동안 면사무소에 출근했던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몰골”로 회복했다.


반년 전, 스마트폰이 생긴 아빠는 매일 유튜브 영상을 한두 개씩 보낸다. “도토리묵 황금 레시피, 간단함에 놀란다!”, “고추 삭히기, 1년 지나도 아삭(초록 하트)”, “찐 고구마 먹지 마세요!! 제발 이렇게 드세요!!” 나로서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지만, 각종 농작물의 요리법 영상을 공유하는 아빠. 어느 날, 동생은 당연히 안 올 거라 생각했는지 나만 콕 집어 불러서 두부와 묵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살면서 이 정도는 알아야 한다면서. 콩물에 간수를 붓자 건더기들이 뭉치며 순두부의 형태를 더해갔다. 놀라움에 “오”를 연발하자, 두부를 짜는 그의 손놀림에 힘이 들어갔다. 그날 두부는 두부 특유의 부드러움이라곤 없이 딱딱했지만, 아빠의 표정만은 연두부처럼 흐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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