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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별 Jan 12. 2024

틀에서 벗어나야 할 때

영화 < 엘리멘탈 >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여태까지 내 꿈인 줄로만 알고 이뤄지길 바라며 내 성질을 눌러왔는데. 그렇게 전념하며 꾸려온 내 삶에 왜 나는 없는 걸까?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나를 가둔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내 꿈으로 강제된 누군가의 꿈은.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꽤 찾은 것 같아.

주변에서도 나한테 소질이 있다네? 그동안 나한텐 당연한 거였는데 말이야. 그런데, 내가 이 일을 해도 되는 걸까. 이 질문에 앞서, 내가 선택이라는 걸 해도 되는 걸까? 일상으로 돌아오면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아. 나도 답답해. 나는 왜 참아야 하는 걸까. 나랑은 정말 맞지 않기 때문에? 나는 착한 사람이고 싶으니까? 내 삶에서 내가 원하는 걸 하려는 건 너무 이기적인 심보인 걸까.



그런데 나는, 예전부터 그래왔듯 참을 수가 없다. 원하던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나는 진정으로 원하는 나의 삶을 꿈꾸었다.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을, 진정으로 피어오르는 내 마음을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다. 절대 닿을 수 없을 거란 이 웅성거림 속에서도.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향한 모험을 서슴지 않을 거야.


유리는 쉽게 깨지곤 하지.
하지만 나는 마음만 먹으면 아주 커다랗고도
단단하게 만들 수 있어. 아주 아름답게도.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자.

솔직히 엘리멘탈이 던지는 메시지는 뻔했다. 하지만 뻔하다는 말이 무시해도 된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모순적이게도 삶에선 이 뻔한 것들을 놓치는 순간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인공 앰버처럼, 내가 나 자신을 ‘이렇게 살아야만 해, 그건 너무 당연한 거야’라는 틀에 가두는 순간, 그 틀 속에서만 행동하려 하고 틀 속 이외의 행동은 꿈꾸지 않는다. 그리고 그 틀은 곧,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한계가 된다.


틀은 내가 하고 있는 무엇에든 씌울 수 있는 유동적인 것이다. 이리도 유동적인 탓에 나도 모르는 새, 어떠한 틀 속에 존재할 수 있다. 그럼 내가 이 틀 속에 있다는 건 언제,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 걸까? 앰버의 경우, 틀 밖에 존재하는 웨이드의 말을 통해 이 틀에 대해 생각하고 인식할 수 있었다. 그 밖에도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면 생각보다 빠르게 인식할 수 있는데, 현재 내 행동들을 되돌아보며 혹시나 내가 이렇게 해야만 한다고 믿으며 해온 것은 아닌지, 나 자신에게 질문하는 시간을 가지면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틀이 제시하는 한계만큼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나는 이 틀을 믿고 있는 거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성장을 한계 짓는 틀을 굳건히 믿으며 하루하루를 그렇게만 꿈꾸고 행동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틀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틀이라는 건 내가 생각해내지 않은 경우도 많다. 다시 말해, 틀에 갇히게 되기까지 외부의 요인이 영향을 많이 끼칠 수 있다는 거다. 내가 만들지 않은 틀인데도 내 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점은, 결국 그 틀은 내가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아무리 남들은 신경 쓰는 것이라도, 내가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은 퇴색되기 마련이다.



나는 하나의 틀을 받아들이는 원인과 과정이 매번 비슷하다. 그래서 이번 영화를 계기로 한 번 정리해보려 한다. 또다시 틀에 갇힌 것만 같을 때, 틀 밖의 내 말을 듣기 위해서.

에릭 요한슨 「impossible escape」


틀의 시작은 나를 믿지 못하는 마음이다.

현재 나만의 방식에 대한 믿음이 줄어들며 불안이 생겨나고, 그 불안은 내가 도망쳐 온, 남들도 많이 하는 방식으로 다시금 돌아가게 한다. 다수가 사용하는 방식이기에 초반에는 불안이 줄어든다. 하지만 나에겐 맞지 않는 방법이기에 결국 불안이 더욱 높아지는 결과가 나타난다.


그럼에도 그 방식만을 이어가는 이유는?

내가 틀 속에서 생각하게 됐기 때문이다. 틀 속의 나는 더 이상 새로운 방식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고 그 속에서 연명하는 태도를 보인다. 나는 나에게 맞는 방식을 충분히 만들 수 있는 사람인데도, 틀 속의 나는 그 가능성을 철저히 배제한다.


굴레 같은 이 틀을 인지했는가? 그렇다면 벗어나는 방법은 간단하다. 결국에 내가 무얼 원하는지(욕망)현재 하고 있는 활동(이루기 위한 방식)을 되돌아보는 것. 그리고 이 방식을 계속했을 때 욕망을 이룰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게 왜 틀에서 벗어나는 방법인지 잘 모르겠다면, 그에 앞서 불안이 솟는 이유에 관해 알아야 한다.


불안이 솟는 이유는 현재 하는 걸 계속한다 해도 목표를 이룰 수 있을지가 명확하지 않아서이다. 물론 미래에서 명확한 건 없다. 그렇기에 내가 믿는 나의 가능성은 정말 중요한 거다. 그러한 나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현재 내가 하고 있는 활동에서 비롯된다. 내가 생각해도 잘 되고 있거나 흥미롭거나, 잘은 모르겠어도 할 힘이 자연스레 생긴다는 건 그 믿음이 생겼다는 징조이다. ‘나’라는 개인에게 진정으로 맞는 행동이라면, 하면 할수록 그 목표를 정말 이룰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고, 그 희망은 하면 할수록 확신으로 번진다.

에릭 요한슨 「sunriser」


나는 요즘 희망적인 행동을 해나가고 있다. 새롭게 도전한 이 행동은 나에게 재미있고 흥미롭고, 무엇보다 이렇게 꾸준히 한다면 내 목표를 진짜 이룰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든다.


내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는지

이루기 위해 현재 무얼 하고 있는지

되새기는 시간은

틀 속에 나를 가두지 않게 한다.

내 목표의 가능성을 증폭시킨다.



엘리멘탈 영화에서는 믿어왔던 틀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신의 행동과 욕망을 생각하게 된 앰버를 볼 수 있었다.


Elemental
: 광포한(미쳐 날뛰듯이 매우 거칠고 사나운) 자연력의
기본(근본)적인


영화의 제목이 <엘리멘탈>인 이유를 나름 생각해 보았다. 먼저 주인공인 앰버는 참을성이 없다. 아빠의 가게에서 고객을 대할 때도 쉽게 폭발하며 다른 이와 소통할 때도 폭발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이러한 모습이 좋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앰버의 엘리멘탈한 성격이 앰버가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게끔 했다고 느껴졌다. 또한 앞에서 영화의 메시지는 꽤 뻔하다고 말했다. 그만큼 근본적인, 엘리멘탈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의미이지 않을까.


영화 <엘리멘탈>은

우리가 근본적인 것(element)을 놓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질문을 던진다.


지금 우리는 엘리멘탈한 삶을 살고 있는 걸까. 아니라면 변화하기를 택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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