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에 접어들자마자 봄이 찾아왔다. 오후에는 얇은 봄코트로도 충분히 지낼만하다. 꽃샘추위도 별나지 않을 정도라 가볍게 넘어갔다. 어제는 두툼한 겨울 이불을 빨아서 널어놓고, 겨울을 함께 보낸 옷들을 세탁소에 맡겼다. 작은 방에는 오후부터 해 질 녘까지 해가 잘 들어 봄이 오면 티타임 자리를 만들 생각이었다. 잘 안 쓰는 의자와 티테이블을 옮겨다 놓고는 앞으로 보낼 포근한 날들을 떠올렸다. 아, 전기장판은 아직 치우지 않았다. 잠은 아직도 따뜻한 이불속에서 자는 게 좋다.
정말 봄이 온 거야? 생각할 새도 없이,
그래 정말 봄이 왔다.
이번달은 참혹한 개인사로 매일 두통약을 달고 지냈다. 약을 집어넣으면 곧 다시 꺼낼 일이 사방에서 터져 그냥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최근 본 드라마 주인공이 안정제 중독으로 나오는데, 어째 약통에서 수시로 약을 꺼내는 모습이 나랑 꼭 비슷했다. 중요하게 꼭 해야 하는 일들도 거의 처리하지 못했다. 어떻게 저렇게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정도의 업무만 처리하고, 하루하루 버티면서 지냈다. 이제야 좀 수습이 됐다. 정신을 차려보니 3월 중순이다. 시간이 이렇게 빠를 수가.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의 속도가 빨라진다더니 요즘은 시간이 달리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내 손을 놓고 자기 혼자 먼저 가버리는 것 같다. 봄이 오는 건 기쁘고 성큼 떠나는 세월은 섭섭하다.
그래도 이맘때는 좋은 점이 더 많다. 새해가 주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하다. 첫 번째는 1월 1일, 두 번째는 설날 즈음, 그리고 세 번째는 지금이다. 사계절의 첫 번째 계절이 시작될 테니 올해의 계획을 정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줄게. 분명히 다 잘될 것 같은 신기한 버튼이다. 누르면 초기화, 이제부터 다시 시작해 봐. 원하는 것들을 지금 처음부터 다시 다 시작할 수 있어. 뻔한 표현이지만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다. 얼어있던 개울이 녹고,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볕을 먹은 이끼가 자라는 일이 너무나 당연하게 주어지는 날들. 이 변하지 않는 흐름을 따라 내 꿈도 몇 개쯤은 순탄하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고 싶어 진다. 그렇게 되는 계절은 언제나 봄이다. 봄에는 누구라도 한 번쯤 행복한 상상을 한다. 이 계절이 가진 가장 멋진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