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이 좋아서 해외 학위도 없고, 유창하지도 않은 영어로 싱가포르, 미국을 거치면서 커리어를 이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와 다른 채용환경과 기업문화, 나의 상황... 등 여러 요인으로 어느 순간 나의 커리어가 정체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예전처럼 바쁘게 노력하는 일상을 만들어보려다 보니 한국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늘 바쁘게 살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어려서였을까?... 늘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가득하던 20대, 30대 초반에는 자기 계발서를 끝도 없이 읽었었다. 소설을 읽으면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았고 (지금은 소설만 읽는다...) 늘 끊임없이 어떤 노오력 같은 것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체력적으로 시간적으로 실현가능성이 있든 없든 무조건 새벽반 외국어(영어, 중국어) 강좌들을 2개씩 끊어두었고, 주말에도 늘 공부할 것들을 챙겨서 카페를 전전했다. 통근하는 대중교통 안에서는 재밌는 드라마를 보면 죄책감(?)이 들어서 졸더라도 꼭 자막 없는 미드나 영어뉴스, 혹은 영어교육 방송을 들었다.
일도 정말 열심히 했다. 돌아보면 왜 그렇게 바빴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늘 일이 많았고, 스스로도 늘 나의 역할과 업무영역을 문서로 만들어서 업데이트하고 관리하면서 부장님, 상무님 등과 미팅할 때 언제든 브리핑할 준비를 했었다. 모두 퇴근하고 난 텅 빈 사무실에서 조용히 일을 더 하거나 공부를 하는 것이 좋아서, 특별한 약속이 없는 한은 야근 혹은 그냥 사무실에 남아있기를 거의 습관처럼 했던 것 같다.
물론 새벽반 수업들을 지각하거나 결석하는 날들이 숱하게 많았고, 사무실에 남아서도 그다지 생산적인 것들을 하지 못하는 날들이 허다했다. 다만 불안감, 혹은 욕구불만(?) 같은 어떤 감정이 계획이나 바쁜 일정 없이 여유를 즐기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뭔가 끊임없이 아등바등하고, 삽질이라도 계속해야만 원하는 어딘가에 도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불안증이 한국을 떠나면서 확연히 줄어들었다. 오히려 지금 생각해 보면 막대한 아파트 렌트비와 생활비로 한국에서보다 여유가 없었을 싱가포르에서도 한국에서 들었던 것 같은 불안감이나 불안정한 기분은 들지 않았었다.
나는 왜 덜 불안했을까... 오고 싶던 곳에 이미 와서?... 영어 말고도 업무에 도움이 되는 공부를 하거나 그 외 자기 계발을 할 것들은 숱하게 많은데 나의 노력의 원동력이던 불안이 확연하게 줄어들어 버린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가장 큰 차이는 날씨와 사회 분위기, 그리고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을 숱하게 보게 되는 대중교통이었던 것 같다...
사계절.... 3-4개월마다 달라지는 날씨는 벌써 가을! 아 벌써 겨울!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고 아니 한 계절이 가도록 뭐 하며 살았을까 생각하게 만들고 불어오는 바람은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나를 불안하고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다들 바쁘고, 다들 노력하는 사회 분위기... 한국 사람들은 어디 유전자에 특이점이라도 있는지... 정말 일을 열심히 한다. 싱가포르에서도 야근은 많이 했었는데, 그때도 다른 팀 야근하는 사람들 중에 한국 사람인 경우가 많았다. 미국에서도 업무시간이 아닌데 메일이 오고 가는 경우는 적어도 90퍼센트는 한국인 동료로 봐도 무방할 듯싶다.
게다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보는 사람들의 바쁜 모습, 분주함이 주는 자극들... 이런 것들의 노출이 적어지다 보니 불안감 수위는 점점 더 낮아진 것이 아닌가 싶다. (싱가포르에서도 지하철이나 버스에 사람이 많긴 했지만 한국에서 느껴지는 분주함, 반드시 이 열차, 버스를 타야겠다는 엄청난 의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것 같다... )
만약 늘 덥거나, 매우 더운 두 가지(?) 계절만 있는 싱가포르가 아니라 다양한 계절이 있는 유럽이나 다른 도시였다면, 그리고 미국에서도 거의 1년 내내 온화한 날씨인 캘리포니아가 아니라 4계절 다 있고, 극한 여름과 겨울 한파가 있는 동부에 살게 되었더라면 달랐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이루는 것은 환경과 시스템이 아닌가 싶다. Atomic habits (아주 작은 습관의 힘)의 저자도 환경이 행동을 결정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다시 그 분주하고 치열한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가...? 그렇지는 않다... 지금은 돌보아야 할 쪼꼬미도 있고, 나이도 있으니까, 그때처럼 치열하거나 간절하게는 말고, 지치지 않게 오래 꾸준히 일상 안에서 노력하는 삶을 살고 싶다. 그래도 20대, 30대 때 매우 고되고 치열했던 경험은, 오늘의 나를 좀 더 성숙하고 강단 있는 사회인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날들이 있었음은 큰 축복이고 감사할 일이다... 돌아보니 힘들게만 느꼈던 서울의 분주함은 나를 늘 깨어있게 만드는 축복이었던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