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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게 굴복하기로

인간의 굴레에서 - 서머싯 몸

by 보멍
"사람은 자기 시대가 믿는 것을 믿는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게 진리라는 건 어떻게 알지요?"
"모르지."
"성인이 과거에 믿었던 것이 틀리다면, 지금 우리가 확신하고 있는 것도 틀리지 말란 법이 있나요?"
"동감일세."
"그렇다면 뭘 어떻게 믿을 수 있지요?"
"모르겠어."
"사람은 늘 자신의 이미지로 신을 만들어 왔네."
"....도대체 신을 믿기는 왜 믿어야 되는지 모르겠군요."

사람은 누구나 잘 살고 싶어 합니다. 삶은 연속된 선택으로 이루어진 덩어리와 같기에 하나하나 선택의 기로에서 고심합니다. 세상에 때가 덜 묻은 아이들조차도 딸기 맛 사탕과 포도 맛 사탕 사이에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걸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건 타고난 인간으로서의 한계, 굴레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고, 후회를 되돌릴 수 없는 굴레를 타고났습니다. 이러한 굴레 안에서도 어떻게든 잘 살아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먼저 권위에 복종해 봅니다. 어른들의 손에 이끌려 알게 된 신의 존재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며 그의 말씀대로 살아보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읽게 되는 이상적인 책들과 망각의 장밋빛 아지랑이를 통해 과거를 돌아보는 나이 든 사람들의 말을 따라 비현실적인 이상을 그려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복종했던 그들의 말 또한 절대적인 옳음이 아니라 각자 옳다고 믿기로 한 다짐에 불과함을 깨닫습니다. 자기가 읽은 모든 것, 자기가 들은 모든 것이 거짓말투성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달으며 그들 인생이라는 십자가에 때려 박힌 못을 하나씩 뽑아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 이런 꼴이 되고 말았는지 알 수 없었다. 언제나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하려고 애써 오지 않았던가. 힘 닿는 대로 남을 도우려 했으며, 자신이 남보다 더 이기적이었다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이런 곤경에 빠지고 말다니 참으로 부당하지 않을 수 없다.

어른들의 말이 항상 옳지 많은 않다는 걸 알게 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이성을 믿기로 합니다. 더 많은 경험을 하고, 더 많은 지혜로운 말들을 가려 읽으며 나의 이성을 갈고닦으려 노력합니다. 어느 정도 꽤 괜찮은 선택을 하고 나서는 우쭐대는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남의 말에만 따라 사는 이들이 어리석어 보이고, 깊이 고심하지 않고 되는대로 사는 이들을 한심하게 느낍니다. 그동안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자기 나름 삶의 원칙도 세워봅니다. 이 기준에 따라 살면 세상의 모든 일들이 다 자기 뜻대로 풀릴 것이라는, 적어도 이 세상에서 눈먼 돌에 맞아 아파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더 본격적인 세상으로 나아가게 되었을 때, 원칙이 작동하지 않는, 전 존재가 불가항력으로 떠밀려 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나를 그렇게 휘어잡는 힘은 이성으로도 도무지 뿌리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옳다고 믿었던 것이 사실 그렇지 않을 때가 많았고, 나에게 이득이 된다고 계산했던 것이 틀렸음을 알게 됩니다. 본색을 드러낸 세상에 제대로 털려보고 나서야 깨닫습니다. 깊은 사색 끝에 확립한 원칙조차도 그 힘에는 별 구실을 못한다는 것을. 지혜로운 말은 많이 알지만 그건 실제 상황에서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오로지 내가 직접 겪고, 부딪히며 내 가슴에 새겨진 흔적 만이 끝없이 요동치는 세상의 풍파 속에서 중심을 잡게 해준다는 것을.







그가 여태껏 만난 관념주의는 대체로 삶으로부터의 비겁한 도피처럼 여겨졌다.

때로는 낭만을 쫓았습니다. 아름다움과 사랑만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습니다. 그동안 똑똑하다고 믿었던 스스로가 사실 속물이었음을 반성합니다. 그동안 뜬구름 잡는다고 생각했던 이들의 말이 사실 그 안에 짙은 진실이 담겨 있었습니다. 나 또한 어느새 그들과 같은 언어를 쓰기 시작합니다. 사랑을 이야기하고, 그렇게 해서 어떻게 살 건데라며 현실을 들이미는 사람들에게 희미한 웃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속으로 그들을 속물이라고 비웃습니다. 착실하게 현실을 살아가는 친구들을 보며 나는 그들과 달리 진짜 삶을 산다고 스스로 위안 삼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이 서성입니다. 그 불안을 내 수양이 부족한 탓이라고 치부하며 외면합니다. 하지만 현실을 미룰 순 있지만 떠날 수는 없는 법, 착실하게 시간이 흘러 그동안의 성과를 기쁘게 수확하는 친구들을 보니 불안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버렸습니다. 이제서야 내가 선망하며 뒤쫓던 이들의 최후가 눈에 들어옵니다. 가난,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기 위해 하는 고된 일, 더러운 다락과 카페 테이블을 오가는 단조로운 삶, 눈두덩이 흐릿해진 가엾게 늙은 몸. 그들은 나를 보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기서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시간이 있을 때 그렇게 하게."





행복에 굴복하는 것은 패배를 인정하는 것인지도 몰랐으나 그것은 수많은 승리보다 더 나은 패배였다.

먼 길을 돌아 제자리에 섭니다. 비로소 깨닫습니다. 인간으로서의 나를 구속하던 가장 큰 굴레는 학교도, 어른도, 치기 어린 욕망도, 돈도 아닌 '의미 있는 삶'이었음을 말이죠.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 잘 살고 싶은 그 마음이 내 영혼에 달린 족쇄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애초에 우리는 어떤 숭고한 의미를 지니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저 태어나고, 고생하다, 죽는 것입니다. 직조 공이 양탄자의 정교한 무늬를 짜면서 자신의 심미감을 충족시키려는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을 갖지 않았듯이, 우리의 삶 또한 자기만족에 불과합니다. 어떤 행위도 쓸모없는 만큼 꼭 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하는 것뿐입니다. 삶은 하나하나가 다 각자의 작품입니다. 살면서 겪는 경험, 생각, 감정, 느낌은 한 올의 실이 되어 엮이며 삶의 무늬를 만들어갑니다. 예술성을 따지고 들자면 누가 누가 더 가치 있는지 논할 수 있으나, 자기만족을 위한 작품에 그런 잣대가 필요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배경으로 하여, 삶의 거대한 날실에, 사람은 다양한 실가닥을 선택하여 무늬를 짬으로써 자기만의 만족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공허한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제부터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무슨 일이든 그저 삶의 무늬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동기가 될 뿐입니다. 고난, 슬픔, 아픔에 호들갑 떨지 않게 됩니다. 죽음이 다가오면 저는 무늬의 완성을 기뻐할 것입니다. 그 예술품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저 하나뿐이라 한들, 자신의 죽음과 함께 그것이 사라져 버린다 한들, 그 아름다움이 결코 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저는 그동안 남의 말과 글이 주입해 온 이상을 좇아왔을 뿐 제 마음의 욕망을 따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언제나 어떤 것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좌우되었을 뿐 제 마음이 진정 원하는 바를 따른 적이 없었습니다. 현실과 이상이 제 자리를 찾아갑니다. 둘 중에 하나 만을 택할 필요가 없습니다. 현실에 단단히 발을 딛고 머리로는 이상을 바라보며 살기로 합니다. 그동안 죄악으로 여겨왔던 '지금에 만족하는 삶'에 먼지를 털어냅니다. 미래의 영광이 아닌 현재의 행복에 굴복하기로 했습니다. 행복에 굴복하는 것은 패배를 인정하는 것인지도 몰랐으나 그것은 수많은 승리보다 더 나은 패배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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