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차림에 알아차림 - 루퍼트 스파이라
우리는 '나'라는 단어에 익숙하지만 '나'가 진정으로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나'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답을 내리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잣대를 정해야겠습니다. 진정한 '나'라면 언제나 변치 않아야 할 것입니다. 조금도 훼손될 수 없어야 합니다. 잠시가 아니라 영원히 '나'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름은 누군가가 나를 구분하기 위해 붙인 단어일뿐 '나'가 아닙니다. 직업은 내가 잠시 맡은 역할 일 뿐 '나'가 아닙니다. 몸도 '나'라고 할 수 없습니다. 팔다리가 잘려도 '나'는 여전히 '나'일 뿐, '나'는 조금의 훼손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 집, 내 차, 내 핸드폰, 내 카메라, 내가 사랑하는 모든 물건들 역시 다 내가 잠시 갖고 있는 것이지 '나'가 아닙니다. 감정도 생각도 기억도 순간적으로 스치는 바람 같은 것일 뿐 영원하지 않기에 '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가짜 '나'를 없애고도 남은 하나, 바로 내가 경험하고 있음을 아는 인식, '알아차림'만이 진정한 '나'입니다.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잡히지도 않는, '알아차림'이라는 인식만이 나라니. 그럼 좀 더 받아들이기 수월한 이름, 직업, 감정, 생각, 기억, 물건 따위가 '나'가 아니라는 것에 집중해 봅시다. 이것들은 분명히 '나'가 아니지만, 분명히 '나'가 아닌 것을 '나'라고 생각하는 오해 때문에 모든 고통이 만들어집니다. 물건을 잃게 되거나, 잃을 것이라 생각될 때 우리는 고통을 느낍니다. 물건을 잃는 것이 '나'를 잃는 것이라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내 생각이 틀렸다고 꼬집을 때 고통을 느낍니다. 내 생각이 공격받는 게 '나'를 공격하는 것과 같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직업이 형편없다는 이야기를 듣거나, 스스로 그렇게 느낄 때 '나'는 고통을 느낍니다. 내 직업의 가치가 '나'의 가치를 나타낸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다 '내 것'에 불과한 것일 뿐 그 자체가 곧 '나'인 것은 아닙니다. 이 엄청난 착각으로부터 수많은 번뇌와 괴로움과 두려움과 분노가 발생합니다. 반대로 번뇌와 괴로움과 두려움과 분노가 없는 평온한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나'가 아닌 것을 '나'로 받아들이는 오해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나'가 아니란 사실이 가슴 깊이 들어오게 되면 '나'는 곧 알아차림임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왜냐면 그것 말고는 '나'를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가 곧 알아차림이라는 이 거대한 앎은 나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완전히 바꿔버립니다. '나'라는 것이 이 몸뚱어리로 만 한정되지 않음을 자연스럽게 깨닫습니다. 내가 인식하는 모든 것, 내 앞에 있는 너와 당장 보이지 않지만 분명하게도 손길을 주고받는 모든 이들, 이내 나를 둘러싼 세상 자체가 곧 '나'임을 알게 합니다. 몸으로만 한정되던 '나'가 폭발적으로 팽창합니다. 더 이상 이기적인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나와 관계없는 일 따위는 사라집니다. 너의 죽음은 곧 내 일부의 죽음이 됩니다. '나'라는 틀의 확장은 희생이나 힘이 드는 일이 아닙니다. 넓어진 만큼의 사랑과 자유를 얻게 되는 일입니다.
아무리 말로 '나'의 본질은 알아차림이라고 설명해도 스스로 그것을 느끼지 못하면 아무 의미도 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나'에 대한 탐색, 탐구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나를 찾고, 나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내가 나를 향해 걸어간다고 상상해 봅시다. 이내 그건 불가능한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나는 나 자신을 향해서는 한 발짝도 갈 수가 없습니다. 이미 내가 서 있는 곳이 나 자신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을 얻어서, 깨우침을 통해, 무언가를 성취하여 진정한 '나'가 된다는 것은 환상입니다. '나'의 본질은 알아차림 임을 느끼기 위해서는 어디론가 향해야 하는 것이 아닌 반대로 어디론가 향하려는 마음을 지워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이곳에 서있는 것이 '나'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어디론가 가려고 합니다. 무엇인가가 되고자 합니다. 지금 이곳에 있는 '나'를 간과하고 더 높은 곳에 있는 '나'를 상상하며 그곳으로 가고자 애를 씁니다. 그 애씀이 나를 잊게 만듭니다. 나를 잃게 만듭니다.
'존재'는 '되기'에 앞섭니다. 우리는 무언가가 됨으로써 나라는 세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힘을 갖게 됩니다. 무엇이 된다는 것은 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이고,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살아냄으로써 나라는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어 갑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면 좋은 것이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쫓기듯 무언가가 되기 위해 애쓰는 것과 가만히 있어도 되지만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 위해 무언가가 되고자 애쓰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나는 언제라도 '되기'를 멈출 수 있습니다. 무엇이 되고자 하는 것 또한 나의 선택임을 깨달을 때,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로 머무는 것이 쉼임을 알게 됩니다. 쉼을 모르고 산을 오르는 것, 정상을 잊은 채 영원히 쉬는 것 모두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내가 정한 정상을 향해 열심히 산을 오르다 숨이 찰 때 잠시 지금에 멈춰 풍경을 즐기는 것, 그것이 내게 깃든 생명을 제대로 살아내는 길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