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슨한 연결이 주는 위로

사유의 밤 북클럽

by 작은 의미

서산 너머로 해가 내려앉고 검푸른 하늘이 찾아왔다.

연극 무대 막이 바뀌듯 낮과 밤이 서서히 바뀌는 시간, 책방 문을 열고 반가운 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검은 봉지 하나를 들고 들어오는 그의 손에는 간식이 담겨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사유의 밤’ 독서 모임이 있는 날이다.




책방을 열고 1년이 조금 지난 후, 독서 모임 참가자를 모집했다. 책방과 가까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서울이 거주지인 지인도 신청했다. 신청자들은 책을 즐겨 읽지 않았거나 책을 좋아했더라도 누군가와 함께 읽고 나누는 경험은 없었다고 했다. 나 또한 독서토론의 경험이 있긴 하지만, 리더로 독서 모임을 진행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낯선 시골 마을에 들어와서 새롭게 만나는 이들과 독서 모임을 한다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직업도 다르고 연령대도 다른 사람들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책은 무엇일까? 어떤 방식으로 하면 좋을까? 누군가는 말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고 누군가는 독점하여 말하려고 하면 어떡하지? 서로 다른 성향이나 가치관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문하는 이가 있으면 어떻게 중재하지? 사사로운 질문으로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면 어떡하지?




독서 모임 첫날, 사는 곳도 연령대도 직업도 다른 사람들이 모였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조금은 어색하고 긴장된 모습이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우리의 독서 모임은 공통된 책을 읽은 후 서로를 설득하거나 찬성, 반대를 표하는 방식이 아닌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교환하는 방식의 독서토론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몇 가지 규칙을 정했다.


1. 모든 사람이 말한다. 혼자 독점하여 말하지 않는다.

2. 타인의 말에 경청한다.

3. 타인의 말에 비방, 비난, 비판, 피드백하지 않는다.

4. 개인적인 성향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 (종교, 정치, 성 등)

5. 개인적인 질문 및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름이나 호칭 대신 닉네임을 부르기로 했다. 멤버를 짧게 소개해 볼까 한다.


김포백구두 독서 모임의 공식 셰프다. 검은 봉지에 간식을 챙겨 오는 것은 물론이고, 책 속에 특별한 음식이 나오면 그 음식을 직접 해 왔다. 포틀럭 파티가 있는 특별한 날에는 주요리를 책임졌다.

모두는 문수산 날다람쥐다. 문수산을 오르내리던 실력으로 히말라야 트레킹과 산티아고 순례길도 너끈히 해 냈다. 히말라야 트레킹 갔을 때 현지 셰르파가 유럽 남자들보다 더 잘 걷는다며 놀랬다고 한다. 모두가 문수산 날다람쥐라면 문수산 늘보도 있다. 문수산 늘보라는 닉네임과 어울리지 않게 손뜨개하는 그녀의 손은 바람같이 빠르고 정교하다. 대문자 T인 그녀는 대문자 F들과 평정을 유지해 주는 역할을 한다. 리사는 제일 먼 곳에서 오지만 항상 제일 먼저 도착한다. 독서 모임의 맏이로서 성실함 뿐만 아니라 아기자기한 소품을 좋아하고 감각적인 패셔니스트로 독서 모임의 분위기를 이끈다. 승지는 맨 마지막으로 독서 모임에 합류했다. 지난겨울, 김포 시내의 책방 북토크에 갔다가 우연히 만났다. 조용하면서도 다정한 그녀는 책과 관련된 작은 선물을 준비해 와서 나눠주곤 한다. 마지막으로 우즈우드아립은 부부다. 그리고 독서 모임의 막내다. 젊은 이 부부가 독서 모임에 참여한다고 했을 때 반신반의했다. ‘한두 번 참여하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그만두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다. 똑같은 책을 두 권씩 사서 읽고 온다. 때론 아내가 바빠서 책을 다 읽지 못하면 남편이 은근슬쩍 놀리듯이 고자질하기도 한다. 천성이 착하고 여린 아내 아립이 본인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가도 슬퍼서, 안타까워서, 행복해서 눈물을 흘리면 남편인 우즈우드는 그런 아내를 보며 휴지를 건네주고는 ‘하늘 보고, 숨 크게 쉬고’라며 등을 두드린다. 나지막한 그의 토닥임은 그 어떤 위로보다 다정하다. 부부가 같은 책을 읽으며 생각을 나누고 공유하는 것은 나의 꿈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나의 남편이자 책방지기는…? 참여하지 않는다. 아니 때때로 참여한다. 먹을 때만. 부부가 도서관이나 책방에서 따로 또 같이 책 읽는 모습을 꿈꾸었던 나는 이들 부부를 보며 아쉬움을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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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모임 멤버들의 평소 단체 메신저는 조용하다. 서로 각자의 자리에서 별다른 연락도 없이 지낸다. 타인의 사생활에 관해 묻지 않기로 규칙을 정했으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굳이 묻지 않아도 각자의 고민을, 아픔을, 삶을 이야기하게 된다. 누군가 어렵사리 꺼내 놓은 이야기에 위로나 어설픈 충고를 하지 않는다. 가만히 경청하며 공감하는 눈빛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눈처럼 소복소복 쌓여갔다. 꽁꽁 싸매 놓았던 상처를 풀어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되기도 했다. 아립은 독서 모임이 자신의 상처에 반창고 같은 존재라고 한다. 간암 수술 후 독서 모임 참여를 위해 한 달 만에 첫 외출을 했다던 김포백구두는 투병 중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고, 가장 멀리서 오지만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리사는 책을 읽고 그 시간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껏 얘기 나눌 수 있는 이 모임이 너무 좋다고 한다.


한 달에 한 번 만나지만 그 어떤 공동체보다 따뜻하다. 너무 가까우면 뜨거워 피하게 되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때 몸도 마음도 스르르 녹아드는 한겨울의 난로 같다.


독서 모임이 끝나고 나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우리 오늘도 참 좋았다’라며 느슨한 연결이 주는 위로를 안고 책방을 나간다.


마당으로 나오니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고, 어느새 달은 머리 위까지 올라와 있다. 따뜻한 겨울밤이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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