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깜빡 했을 뿐인데 어느새 연말, 이렇게 몇 번 더 깜빡이다가 관뚜껑 문 닫는 게 인생이라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허무에서 의미를 기워내는 것이 삶 앞에 놓인 사람에게 필요한 태도지 싶다. 2022년은 사회적으로는 다사다난과 사건사고의 연속이었으나,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활동도 사생활도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해였다. 막연하게 꿈꾸던 활동이 조금씩 자리 잡았고 오랫동안 벼르던 취미생활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대단히 열심히 계획하지 않아도 이렇게 조금씩 한 해를 돌아보고 현재의 지평을 살펴보며 미래를 기약하는 게 삶의 동력이 된다. 그런 차원에서 올해는 또 어떻게 살았나 사생활과 활동을 정리해 봐야지.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는 나의 작고 귀여운 사적 자아를 위한 사생활.
안 그래도 일 중심 인간인데다 불안이 큰 와중 프리랜서로 살아가다 보니까 사생활은 늘 뒷전이었다. 그렇게 스스로 혹사하다가 공황과 번아웃 때려 맞고 정신 차렸다. 삶은 활동을 위한 수단이 아니며 당장 내일 모레 쯤 끝날 일이 아니라면 오래 활동하기 위해서라도 사생활은 너무나 소중하다. 더 이상 스스로를 착즙하지 말고 일상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올해의 자기돌봄을 돌이켜 보자.
1) 프로 외박러의 삶 (ft. 여행과 캠핑)
올해는 연초에 혼자 약속했던 분기별 외박을 완전 초과 달성했다.
다녀온 지역을 대충 살펴보면, 부산은 영도의 좁은 골목길 사이 책방이 참 좋았고, 춘천은 쨍한 겨울에 다녀온 청평사가 인상 깊었다. 삼척은 벚꽃 사이로 내다보이는 바다와 굽이굽이 산길을 따라 가다 만난 너와마을도 좋았고 뜬금없이 발견한 동부사택은 완전 취향저격이었다. 물 댄 논을 보러 간 철원, 비를 맞으며 듣는 제천 국제음악영화제, 설악산은 오색약수터에서 추억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고 귓동냥으로 자작나무숲에 다녀왔는데, 힘들었지만 그만한 보람과 아름다움이 있었다. 금산 간디학교는 아마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과 환대로 기억에 남을 듯 하고, 강화도는 비 맞느라 바빴지만 그래도 꼭 묵어보고 싶었던 북스테이에서 하루를 보냈다는 게 참 좋았다. 대전은 올해에만 세 번 정도 가본 것 같은데 그때마다 받는 환대와 활동가들이 인상 깊었다. 당연히 올해도 제주도에 방문하여 지난 추억을 주워 담고 또 새로운 추억을 뿌리고 왔다. 다음에는 영 다른 곳으로 또 가봐야지.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정말 한두 달을 제외하고 거의 매달 타지에서 하루 이상 숙식을 해결한 셈인데, 전적으로 여행만을 위해 떠난 적도 있지만 강의를 빌미로 떠난 곳도 많다. 이 맛에 강사하지 싶다. 또 나름 철칙으로 지역에서 번 돈은 최대한 지역에 환원한다는 원칙을 세워서 지역상권 활성화에 이바지하고 있다. 아주 좋은 소비의 변명이다.
게다가 올해의 기쁨으로 아주 어릴 때부터 꿈꿨던 캠핑을 시작했다.
누군가는 왜 비싼 돈 들여서 고생하고 노숙하냐 하겠지만, 열심히 땀 흘려서 누울 곳 마련하고 먹을 것 차리는 게 내 안에 내재되어 있던 호모사피엔스의 본능을 일깨운다. 가까운 곳으로는 노을캠핑장이 의외의 풍경과 아늑함으로 참 좋았고 세종에 있는 캠핑장도 호젓하고 주변에 구경거리도 많아서 좋았다. 올해는 시행착오를 겪느라 많이 못 다녔다. 내년에는 좀 더 본격적으로 다녀봐야지.
다시 돌이켜 봐도 참 많이 빨빨거리며 잘 돌아다녔다. 지도도 곳곳에 별들을 가득 잘 채웠는데 지금 보니 전라도, 경상도가 좀 허전하다. 특히 목포, 함평, 남원, 다도해, 땅끝 해남, 군산 같은 곳은 이야기만 많이 듣고 막상 한 번도 안 가본 것 같다. 내년에는 이쪽을 위주로 많이 다녀봐야지. 그리고 올해도 기내식을 못 먹어 아쉽다. 내년에는 기회가 되면 해외여행도 모색해봐야겠다.
2) 장래희망은 취미부자 (ft. 동네친구, 뚜벅, 공연, 플스, 놀이모임)
여행도 잘 다니고 활동도 잘 하는 것 같은데, 한편으로 헛헛한 마음이 드는 건, 우리 삶이 큰 이벤트만이 아닌 소소한 일상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라는 걸 느꼈다. 그래서 어떻게든 일이 끝나고 나면 스스로에게 작은 보상이라도 하고, 평소에도 좀 더 그럴싸한 일상을 만들려고 한다.
동네 친구가 생긴 것도 큰 기쁨이다.
슬세권에 있는 친구가 필요하다고 늘 말하고 다녔는데 나이가 들고 부터는 새로운 친구를 만드는 게 참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올해는 동네 친구가 생겨서 일이 늦게 끝나도 가볍게 만나서 같이 마실을 다닐 수 있었다. 정신건강에 이만한 게 없지 싶다.
공연과 전시회, 영화, 드라마, 독서 같은 문화생활도 틈틈이 잘 했다.
특히 개중에는 공연이 큰 기쁨이었다. 해체하고 거의 3년 만에 재결합하여 다시 보게 된 신인류 공연은 인생의 기쁨을 뒤로 미뤄선 안 된다는 교훈을 알려줬다. 올해 가장 많이들은 음악은 버둥이었다. 아직도 ‘연애’와 ‘00’은 도입만 들어도 설렌다. 굳이 올해의 공연과 가수를 꼽자면 단연 정우다. 원체 좋아했지만 금산에서 성공한 덕후가 된 이후로 더 열심히 덕질하며 살아보기로 했다. 특히 정우는 모든 노래가 고루 매력적이라 공연에서 어떤 곡으로 리스트가 짜여도 실패가 없다. 게다가 함께 하는 가수들마다 너무 잘 어울려서 이메민과 함께한 ‘사하라’ 같은 곡은 나오자마자 최애가 됐고 김훨, 예람과 함께한 공연도 너무 좋아서 같이 앨범 안 만드나 기다리게 만든다.
2022년의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플스5 덕분이다.
프리랜서인데다가 불규칙한 일상으로 가득한지라 아무리 친구를 만나 놀고 싶어도 어려울 때가 많다. 그 때 외롭고 지친 심신을 달래준 게 바로 플스5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돈 낭비인가 싶어서 주저했는데, 생각해보니 내가 애를 낳거나 대단히 비싼 취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애껴서 뭐하나, 내가 나를 달래고 돌보지 않으면 누가 나를 위로해주나 싶어 과감히 구입했다. 아직 시간이 없어서 본격적으로 해보진 못했지만 그래도 정말 후회 없는 선택이다. 이 맛에 어른 됐지 싶다.
뚜-벅과 클라이밍도 꾸준히 했다.
살기 위한 몸부림에서 이제는 제법 취미가 된 클라이밍, 연초에는 강습도 받고 소모임 비슷한 것도 시도해 봤으나 아무래도 우르르 몰려가서 운동하는 건 적성에 안 맞는다. 대신 지금도 꾸준히 오전에 들려서 가볍게 운동하는데 그게 제법 도움이 된다. 뚜-벅도 가늘고 길게 하고 있다. 다만 이제 서울경기 북서권의 걸을만한 코스는 어지간히 다 마스터한지라 활동영역을 넓혀야 할 것 같은데 여러모로 조건이 맞지 않아 아쉽다. 다음에는 좀 더 먼 지역으로 여행을 가면서 뚜벅을 해도 좋을 것 같다.
제법 취미 부자로 알차게 잘 살았지만 여전히 노는 모임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주기적으로 만나서 재밌게 노는 모임이 있으면 참 좋지 않을까. 이전에는 그런 아쉬움에 노는 모임을 종종 열었던 것 같은데, 개인사가 바빠짐에 따라 그런 자리를 많이 만들지 못했다. 오프라인이 불가능하다면 게임으로라도 만나거나 자주는 힘들어도 분기별로 한 번쯤은 만나서 노는 자리가 있으면 일상이 좀 더 풍요롭게 느껴지지 않을까. 내년에는 이쪽에 조금 더 신경을 써봐야겠다.
세부 사업 2
활동이란 무엇인가, 여전히 아리송하고 나 따위가 이대로 괜찮을까 싶지만, 그래도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지 싶다. 스스로 활동가로 호칭하기 부끄럽지 않으려면 그래도 이제는 제살길만 찾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함께 살아갈 자리를 마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앞으로도 계속 지속가능한 활동가로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을 잘 기억하고 기록해두자.
1) 함께해요 성평등 교육 활동가 (강의 플랫폼, 군대, 남청, 연애, 페미니즘 입문, 이매진)
먼저 ‘지속가능함’에 방점을 두고 최대한 안정적으로 일과 삶을 분리하기 위해 지정석이 있는 쉐어 오피스를 구했다. 이전에는 로컬스티치를 사용했는데, 아무래도 지정석이 없다보니 모니터나 필요한 물품을 두기 애매해서 출근을 잘 안하게 되더라. 새로 구한 곳은 시간제한도 따로 없고 지정석이 있으면서도 칸막이로 분리되어 있고 널널해서 아주 유용하게 잘 썼다. 다만 아쉬운 점은 공간을 쓰는 사람들과 교류가 전혀 없었다는 건데, 다행히 내년부터는 이한열재단에 공간을 마련하게 되면서 이런 아쉬움도 해소할 수 있을 것 같다.
교육활동 영역과 주제를 넓히고 있다.
기존 폭력예방교육과 성평등 교육에서 반복해서 쓰던 강의안에서 확장하여 연애를 주제로 한 강의안을 새로 개발했고 어설프지만 남성 대상 페미니즘 입문용으로 쓸 강의안을 만들었다.
덕분에 이전부터 꼭 가야한다고 생각했던 군대 강의를 나갈 수 있게 됐고 작년부터 하던 남자 청소년 대상 강의도 이제는 한결 수월하게 잘 진행할 수 있었다. 내년에는 기존 강의안을 활용하여 연령을 좀 더 폭넓게, 고등대상으로 만들어보면 좋을 것 같다. 그 일환으로 워낙 많이 쓰이는 디지털 성폭력 예방교육 강의안을 만들어봐도 좋을 것 같고 아예 ‘역차별’을 주제로 해서 강의안을 만들어도 흥미로울 것 같다. 섹슈얼리티를 주제로 한 강의안 만드는 건 여전히 숙제다. 연구를 한 차례 진행했다지만 아직 정리가 많이 부족하고 스스로도 공부가 더 필요한 주제인지라, 연애로 가볍게 이야기하는 정도에 그쳤는데, 이것을 좀 더 파고 들면 양육자를 비롯한 더 다양한 층위의 남성에게 다가갈 수 있는 강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래도 교육 플랫폼을 만들어야겠다.
강의활동을 하며 못 볼꼴을 너무 많이 본다. 강사노조가 필요하다는 자조 섞인 농담도 이제는 지겹다. 나 혼자 먹고 살 궁리만 하는 게 아니라, 이런 문제를 같이 해결하고 어떻게 하면 이 활동 영역에 좀 더 많은 젊은 강사들이 유입될 수 있을까를 같이 고민하는 그런 교육 플랫폼을 만들어야지 싶다. 올 연말에 함께 활동하는 선생님들과 같이 강의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이 기회에 이 선생님들과 함께 강사를 보호할 수 있는 강사 계약서 같은 것도 만들고 같이 이매진 툴킷 활용해서 강의안 개발도 하고 서로 평가도 나누는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야지. 잘 되면 내년부터 시범 사업을 진행해볼 수 있지 않을까.
2)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행보남, 연구, 출간, 기고)
자주 썼던 이야기인 것 같은데... 올해는 좀 진짜로 남함페 활동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것 같다. 올 초 가현님이 진행했던 행보남 활동이 동력이 되면서 의지가 모인 덕분인데, 이 의지가 계속될 수 있도록 다양한 활동을 도모하고 있다.
학술연구로 <남성 섹슈얼리티 탐구 연구> 활동을 했다.
개인적인 궁금함과 더불어 많은 남성성, 남성연대의 폐해 중 하나가 바로 섹슈얼리티와 엮여 있을 때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그 점을 잘 파고드는 게 남성연대의 균열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여 시도했다. 8명을 인터뷰 했는데, 모든 인터뷰 내용이 다 흥미로워서 좀 더 체계적으로 공부 열심히 해서 집중력 있게 이 활동을 진행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 활동을 토대로 이제 내 역할과 시간을 충분하게 고민해서 내년에 한 번 더 제대로 해보고 싶다.
남함페가 더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 남함페는 내년 총회까지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런 시스템 만드는 일에 취약한지라 특히 다른 구성원 분들이 힘을 모아주고 계신다. 이런 시스템 마련은 고단하지만 결국 이 과정을 통해 남함페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가닿는 환경이 될 것이다. 그 일환으로 교육 활동가를 양성하고 유지하는 플랫폼을 마련하고 있고 종종 돌봄 모임도 하고 있으며 매월은 아니었어도 꾸준히 강의, 워크숍 같은 의미 있는 자리도 만들었다. 내년에 좀 더 안정적으로 공간을 쓸 수 있게 되면 남함페의 자체 강의와 모임을 좀 더 꾸준하게 열어볼 수 있지 않을까. 너무 무겁지 않으면서도 지속가능한 활동이 남함페에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글도 꾸준히 쓰고 있다.
슈퍼 J형 인간인 덕분에, 마감을 놓치지 않고 꾸준히 글을 써내고 있다. 올해는 책 <페미니즘, 남성을 조립하다>와 <우리는 이어져 있다>, <포괄적 성교육>이 출간됐다. <여/성이론> 쪽에서 지면을 빌려주셔서 원고를 기고하는 영광도 누려봤다. 연초까지는 월간 유레카에 매월 원고를 기고했고 하반기부터는 한국일보에 격주로 기고하고 있다. 글을 쓰는 건 괴롭지만 그래도 누가 채찍질 하지 않으면 잘 안 움직이는 사람인지라 덕분에 공부하게 된다. 잘 읽히는 글과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 그리고 해야 할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맨날 쌀로 밥 짓는 얘기 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글을 쓸 때마다 부끄럽지만, 후회는 소용이 없으니 숙고하고 또 써야지.
정리해 놓고 보니 뭘 참 많이 했다.
그 사이에 들고 난 것이 더 많았을텐데, 기억은 짧고 성격은 무심한지라 놓친 게 참 많다. 아무려면 어떨까. 이 허무로 점철된 세계에 특별히 더 의미 있는 방향은 없을지 모른다. 그냥 그때그때 나를 이끄는 인력에 조금씩 기울어가며 방황하는 것이 전부고 이 모든 게 다 길게 꼬리 내린 미련, 바스라지는 흔적일지 모른다. 그래도 또 기어코 뭐라도 뚜들겨 놓으면 그 찰나가 그럴싸한 것 같고 이따 보기에도 참 좋았더라 하게 되니까.
이 정도면 충분하다. 더 할 나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