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딸들
https://brunch.co.kr/@bomhae/52
하나만 낳고, 낳지 말거라
우리 할머니가 첫아들을 낳은 엄마에게 하셨던 말이다. 엄마는 첫째 아들 그러니까 나의 오빠를 낳고 정신을 잃었다. 하혈을 심하게 했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했다. 그 모습을 지켜봤던 할머니는 고생한 며느리를 보고 이제 애는 낳지 말라고 하셨단다.
며느리를 아껴주고, 예뻐하셨다던 우리 할머니. 할머니도 딸이었고, 여자였고 며느리였다. 같은 여자로서 며느리를 진심 어린 마음으로 걱정하셨다. 아들 하나를 낳아도 또 낳아야 했던 할머니, 딸 셋을 낳아서 눈치를 봤을 할머니.
얼마 전에 엄마와 통화했다. 궁금했다. 처음 할머니를 만났을 때 어땠을지.
- 엄마, 할머니 처음 뵀을 때 어땠어?
"할머니 점잖으시고, 조용하시고 좋으셨지~ 인상도 좋으셨고, 엄마 고생했다고 너거 오빠만 낳고 낳지 말라고도 하셨잖아~"
-할머니가?!
"응, 그러셨어"
- 근데 왜 나한테는 딸은 시집가면 끝이라 하고, 낳으면 소용없다고 했을까?
"할머니가? 그러셨나? (웃음) 그래도 니 태어났을 때 좋아하시고, 니 얼마나 예뻐하셨다고~"
- 으응.. 그렇긴 한데, 나도 할머니 좋았는데~ 그냥 왜 그러셨을까 하고, 아직도 그게 궁금해서 (웃음)
사실 엄마 세대에 시집간 딸들도 끝이 아닌 시대다. 친정엄마를 챙기는 건 아들들이 아니다. 딸들이다. 딸이 셋인 우리 외할머니를 엄마와 이모들이 살뜰히 챙긴다. 우리 할머니 역시 증조 외할머니가 편찮으실 때 노모 곁을 지키셨다. 그러니 그때나 지금이나 딸들은 시집을 가도 끝이 아니었다. 여자로서 살아가기 참 고달팠던 시대를 사셨던 할머니들, 어머니들. 중요한 건 그대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는 것.
나는 백말띠 해에 태어났다. 성비 불균형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던 해, 백말띠 여자는 팔자가 드세다는 이상한 미신 때문에 여아 낙태 비율이 높았다고 한다. 그 시대에도 여자로서 살아남기는 쉽지 않았나 보다.
어린 시절 '시집가도 끝이 아니란 걸 보여주겠어!'라고 다짐했던 손녀는 어느덧 서른이 넘었다. 할머니를 다시 만난다면, 아니 살아계셨다면, 나는 이렇게 말했을 거다. "할머니, 이제는 딸들이 시집가도 끝이 아니데이~ 오히려 아들 결혼하면 끝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니까 할머니, 딸이 좋은 거야~ 오빠보다 내가 더 자주 전화하지?! 거봐~ 손녀가 최고지?^^ "라고. 그럼 우리 할머니는 웃으시며 그렇다고 하셨을 거다.
우리 할머니,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