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 여행기] 필리핀 보라카이 1편
나는 MBTI, P(계획파가 아닌 즉흥파)인 사람이다. 네 글자 중 P가 가장 극단적인 비중으로 나오는 엄청난 P다. 하지만 그런 나도 솔직히 해외여행을 6일 전에 결정 짓고 싶진 않았다. 이것은 순전히 직장 탓이었다. 현재 직장에서 행사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데, 이보다 불확실성이 더 큰 업무가 있을까 싶다. 갑자기 전날에 행사가 잡힐 수도, 당일에 취소될 수도 있는 그런 일이니깐.
내가 나홀로여행 족이라면 일정이 어떻든 크게 개의치 않겠지만, 함께 여행을 떠나고픈 친구가 있었고 그 친구도 바쁘디 바쁜 대학원생이었으니 그와 여행 일정, 특히 해외 일정을 잡을 수 있는 틈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희망의 가능성이 살짝쿵 열렸다가 닫혔다가, 또 열렸다가 닫혔다가, '아 이번엔 정말 가능하다!' 크게 열렸다가도...또 닫혔다가의 반복이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대개 내게 있었다. 아카시아 잎을 하나씩 떼며 된다 안된다 하는 것 마냥 번복하고 있으니, 괜한 희망고문만 하는 것 같아 나는 해외여행에 대한 마음을 결국 접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의 목포 여행을 급하게 결정해 숙소와 KTX를 재빠르게 결정 지었다.
그런데 다음 날 오후, 직장 내 상황은 또 바꼈고 향후 몇일 간은 행사가 없을 거란 사실이 6일 전에 비로소 확정된 것이다. 흔치 않은 기회였다. 이 6일 안에 반드시 출국해야 했다. 일단 친구는 시험기간이었으니 친구가 시험을 마치는대로 바로 다녀와야했다. 나는 이 사실을 친구에게 급히 전파하고 목포 여행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취소했다. 그리고 동남아행 비행기 티켓들을 급히 훑어 보았다. 베트남과 태국은 다녀와서 패스, 발리는 항공권이 비싸서 패스, 쿠알라룸푸르는 생각보다 별로라는 후기가 있어서 패스, 남은 건 필리핀의 휴양지 섬들. 보라카이였다. 목적지는 그렇게 정해졌다.
그날 점심시간까지만 해도 직장 동기들에게 "올해 휴가..? 해외로는 못갈 것 같아. 여기 일정이 워낙 불확실해서" 라며 우는 소리도 하고, 다음주에 해외여행 간다는 동기를 잔뜩 부러워도 했는데, 갑자기 몇일 후 해외로 훌쩍 떠나버릴 다소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졌다만. 짧은 시간 안에 남들은 '어떻게 갑자기 여행을 가겠어'라고 생각할 때 나는 P력을 발휘해 '이정도면 얼마든지 다녀올 수 있지' 하며 추진한 것에 자부심을 가져볼 뿐이었다. 긍정회로를 돌려 P로서의 자부심을 가져봄이 이 상황에 최선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해외여행을 다짐하고 보니 큰 걸림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여권' 이었다. 친구가 처음엔 여권이 본가에 있는 것 같다고 하여 택배로 받으면 되겠거니 했는데, 그 여권은 유효기간이 만료된 것이었다. 주말 이틀 빼면 4일밖에 안남았는데 그 기간 안에 여권 재발급은 불가능할 터였다. 여권이 아주 초고속으로 간신히 나온다고 해도 항공권 예약할 때부터 여권번호가 필요해 항공권 예약도 못할 상황이었다. 그렇게 큰 좌절감이 거대한 파도처럼 싸악 몰려왔다. 해외여행 가능에서 불가능으로 다시 번복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회사 사람들에게 다음주에 보라카이 갈거라고 신나게 선언해놨고, 소중하게 찾아온 기회를 또 번복하고 싶진 않았다. 최후의 수단이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쓰라린 마음을 겨우 붙잡고 인터넷에 폭풍 검색을 해보았다.
첫 번째, 여권을 4일 안에 재발급 받는 방법이 있을 것인가? 서울 중에서도 어느 동네가 제일 빨라서 4일 걸렸다는 후기도 있고, 온라인이 빠르네 오프라인이 빠르네 하는 후기들이 있었지만, 이것은 온전히 하늘에 운을 맡겨야 하는 것이었다. 신청했는데 여행날까지 여권이 안나오면 모든 것이 말짱 도루묵인 것이다. 그렇게 좌절하고 있다가 일부 나라에서만 가능한 '긴급여권'이란 희망의 끈을 발견하게 됐으니, 롤러코스터를 탄 내 마음은 급속도로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고 있었다.
두 번째, 긴급여권으로 필리핀을 다녀올 수 있는가? 긴급여권은 극히 일부 나라에서만 가능한 거였다. 작년에 올라온 게시물들에서 필리핀은 대상이 안된다는 내용을 보고 마음이 덜컥 가라앉았다가, 최근 필리핀 한인사이트에 올라온 게시물을 보니 올해부터는 가능하게 됐다는 내용에 또 다시 들떴다. 단, 정확한 건 외교부 사이트에서 확인하라는 말에 외교부에 들어가보니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 등 웬만한 동남아 휴양지는 '불가'로 돼있었다. 과연 필리핀은 어떨까?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레 창을 내려보니, 별표* 달고 '대사관에 직접 문의해야 한다'고 안내 돼있는 것이었다. 되는 것도 아니고 안되는 것도 아니고 대사관 문의라니 사람 마음을 제일 속썩이는 문구였다. 그래서 대사관에 직접 연락도 해봤으나 대사관 쪽에선 '확답할 수 없다'는 대답만 하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래도 희미한 희망 한줄기 잡을 수 있었던 건, 열심히 검색하다보면 긴급여권으로 필리핀을 간신히 다녀왔다는 블로거들의 후기가 보이는 것이었다. 또 혼란스러운 마음에 인천공항에까지 문의했는데, 대사관도 아닌 공항직원이 오히려 가능하다며 우리를 안심시켜주었으니 인천공항이 이렇게나 따뜻한 곳이었던가 하며 괜히 감동 받았다. 그렇게 우리는 소수의 블로그 후기와 공항직원을 믿으며 당일까지 조마조마한 마음을 품고 공항으로 갔다.
세 번째, 여권번호 없이 항공권 예매가 가능한가? 우리나라 항공사의 경우 항공권 예매할 때 여권번호가 있어야 하지만 외국 법은 또 달라서 외항사 예약 시엔 여권번호가 필요 없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도 나는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래서 '필리핀 에어라인'으로 항공권 예약을 완료하고 본격적으로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숙소, 액티비티, 맛집, 마사지 등 기본 정보부터 흥정은 어떻게 해야하는지 소소한 꿀팁까지 벼락치기로 알아봐야 하는 것이 많았지만, 그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노는 건 아무리 벼락치기로 궁리해도 재밌으니깐. 또 우리는 즉석에서 융통성 있게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P이니깐! 하지만 여권문제로 인해 우리가 정말 출국할 수 있을지 여부가 여행 당일까지도 확실하지 않았으니, 불안감이 마음 속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급하게 여행을 추진하다보니 여행준비하며 느낄 수 있는 설레임과 기대감을 온전히 그리고 길게 만끽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결국 우리는 아무 문제 없이 잘 다녀왔으니깐,
보라카이의 낭만을 온 몸으로 느끼고 왔으니깐!
하늘도 바다도 해변 위의 야자수도 온통 푸르르던 4박 5일을 기록해보겠다.
P.S. 항상 1년 전부터 해외여행을 계획하는 친구가 있는데
나도 1년 전에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직장에 다니고 싶다.
아무리 P여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