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 여행기] 필리핀 보라카이 2편, 화이트비치
보라카이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다. 동남아여서 마냥 가까울 것 같지만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4시간, 내려서 픽업차량을 기다리고 또 타는 데 2시간,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가 또 섬에서 숙소까지...서울집 기준 도어투도어로 총 10시간 이상 소요된다. 필리핀 여행지 중 세부는 가족, 보라카이는 연인 여행지로 적합하다는 후기들이 많았는데, 그 이유에는 보라카이 가는 길이 멀기 때문인 것도 한몫 하는 것 같다. 젊은 또래들끼리야 가는 길이 다소 멀고 복잡해도 모든 것이 낭만이지만, 남녀노소 다같이 먼 길을 떠나는 건 영 쉽지만은 않으니 말이다.
그래도 보라카이 섬에 내리는 순간 우리를 반겨주는 풍경을 보면, '잘왔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푸른 하늘, 푸른 바다, 그 사이에 푸른 야자수. 모든 것이 푸르른 지상낙원이다.
특히 에메랄드 빛의 바닷물은 어찌나 투명한지 그 속이 훤히 다 보인다. 참 깨끗하다.
새삼스럽게 살아있음에, 두 눈으로 이 풍경을 볼 수 있음에 감사해지는 광경이다.
이렇게 보라카이 섬의 항구에 내리면, 이제 사방이 트인 장난감 같은 차-툭툭이-를 타고 섬 안으로 이동한다. 조그만한 차를 타고 아기자기한 섬동네를 가로질러 갈때, 마치 내가 세상 속 미니어처가 되어 유토피아 마을을 구경하고 있는 듯 했다.
우리의 첫 번째 도착지는 바로 보라카이의 메인 비치인 화이트 비치. 화이트 비치는 (미국 마이애미 팜비치, 호주 골든코스트와 함께) 무려 세계 3대 비치로 손꼽히는 곳이다.
에메랄드빛 바다를 따라 새하얀 모래 사장이 끝도 없이 길게 펼쳐져 있다.
그리고 해가 질 때면 보랏빛 노을이 찾아온다.
낮에도 저녁에도 아름다운 이 비치는 보라카이에 있는 동안 매일매일 들러줘야 한다.
날짜별로 시간대별로 어떻게 다르게 예쁜 풍경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보라카이가 노을이 예쁘기로 유명한 만큼, 화이트비치에선 특히 선셋세일링이라 불리는 '돛단배 타기'를 많이 한다. 다이나믹한 액티비티는 아니지만 보라카이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끽하며 잔잔히 바다를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이다. 돛단배 그물망에 편히 앉아 간단히 맥주도 마시고, 또 배의 주인인 것 마냥 배 끝에 서보기도 하고. 그럼 세상의 모든 속박을 벗어던진 것만 같은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나는 태어나서 돛단배라는 단어를 들어만 봤지 타본 건 처음이었기에 더욱 신기했다. 또 베트남 다낭, 태국 파타야, 괌 등 이전에 내가 가봤던 휴양지에선 본 적 없던 액티비티였기에 새롭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해변에 세 가지 반전이 존재한다.
첫 번째, 사람이 굉장히 많다는 것. 풍경만 보면 한적하고 고요할 것만 같지만, 세계 3대 비치의 명성이 있는만큼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특히 현지 흥정꾼들이 해변에 일렬로 쭉 선 채로 한국인들에게 무조건 말을 건다. "돛단배 타요 돛단배" "마사지 싸요" 등등. 보라카이에 한국인 관광객이 얼마나 많은지, 흥정꾼들은 한국말을 내뱉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다. "한국 업체는 비싸요"라며 맞는 말도 한다. 심지어는 걸어다닐 때뿐만 아니라 식당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을 때도 흥정꾼들은 다가온다. 그래도 나는 원래 놀러갔을 때 관광지면 관광지답게 사람이 많은 걸 선호하기에, 이러한 분위기가 크게 불편하진 않았다. 하지만 사람이 많은 걸 극도로 싫어하는 스타일이라든가 한적함을 원하는 여행객이라면 화이트비치에 갔다가 기 빨림을 당할 수도 있다는 점을 주의하면 좋겠다.
두 번째, 밤 12시가 넘어도 열기가 넘치는 핫플이라는 것. 마치 우리나라 홍대처럼 말이다. 우리나라에선 새벽까지 젊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시끌벅적하게 노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니다. 하지만 보통 해외에선 좀만 어둑어둑해져도 거리는 한적해지고 위험한 분위기가 엄습하니, 근거 없는 패기를 장착해야만 외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현지인들이 없는 명백한 관광지라 그런지, 밤 12시가 넘어서도 여전히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수많은 바에서 다양한 라이브 음악들이 감미롭게 흘러나왔고, 관광객들은 보라카이의 밤을 만끽하고 있었다. 내가 이 사실을 알았단 건 나 역시 밤 12시 넘게 있었다는 것인데. 어쩌다보니 그 시간까지 있게 된건, 저녁 9시즈음에 한 라이브 바에 들어갔다가 '이곳이 아메리칸 아이돌인가, 아니면 세계적인 밴드의 라이브공연장인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엄청난 라이브 무대를 보게 됐고, 그 공연들에 제대로 홀렸기 때문이었다. 그 감동이 무척 컸기에 이에 대해선 별도로 포스팅을 남기겠다.
세 번째, 햇볕이 따사로운 정도가 아니라 바늘같이 따가우니 한낮에 외출 금지, 수영 금지다. 인터넷을 뒤져보면 보라카이를 다녀온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조언이 있다. 대낮엔 수영하면 안 되고 호텔 수영장 그늘진 곳에서 놀거나 마사지를 받아야 한다는 거였다. 그 이유에 대해선 그냥 '덥다'고들만 했다. 나는 생각했다. 단순히 더워서라면 그럴수록 바다에 풍덩 빠져야 하는 거 아닌가. 일단 다들 그렇게 말하니, 처음엔 그 조언을 들어 오후 1시에 실내 마사지를 예약했다. 그런데 마사지를 받으러 가기 전 잠깐 들러본 화이트비치의 풍경이 너무나 반짝이고 눈부신 거였다. 그래서 '아 역시 낮에 마사지 받을 바에 저 풍경을 즐기며 수영하는 게 훨씬 나았을거야'라고 후회했다. 그리고 다음날엔 온종일 바다에 둥둥 떠있을 생각으로, 일어나자마자 화이트비치로 곧장 달려갔다. 오전에 수영하다 젖은 채로 해변가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고, 식당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바다에 빠지고. 우리는 이렇게 온종일 수영만 할 생각이었다. 이 찬란한 바다에 우리 말고는 수영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으니(이때 이상한 걸 눈치챘어야했는데), 우리가 이 바다를 독점했다고 생각하며 실컷 헤엄쳤다.
그런데 한 오후 세시쯤 되었을까. 갑자기 온 피부가 너무 따가운 것이었다. 온 몸이 시원한 물 아래 있었음에도 바닷물을 뚫고 들어오는 햇빛이 얼마나 셌는지, 팔이고 다리고 바늘같이 따가웠다. 잠깐 물에서 나와 카페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으면 괜찮아지겠거니 안일한 생각을 했으나 그 따가움이 도통 가시질 않아, 우리는 그제서야 마사지를 받으러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 보니 피부가 온통 벗겨졌다. 어린시절 국내 바다에서 아무리 놀아도 이런 적은 없었다. 지인들은 내 피부를 보고 어떻게 이렇게 되냐며 신기해했고, 같이 여행간 친구도 한두달 이상 주변에서 놀라움 반, 걱정 반이 섞인 반응을 겪어야만 했다고 한다.
아래 사진이 우리가 대낮에 신나게 수영하며 본 풍경이다. 수평선 끝까지 반짝이며 일렁이는, 투명하고 부드러운 물결. 비록 과한 욕심을 부려서 피부가 타고 상했지만, 아무래도 저 풍경을 보고서는 물에 안빠질 수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이번 일을 후회하진 않는다. 그만큼 화이트 비치를 미련 없이 만끽할 수 있었던 거니깐.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철없이 바다를 온몸으로 즐겨봤다고 생각해본다. 물론 이것도 심한 화상으로까지 안갔기에 할 수 있는 말이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세 가지 주의사항만 캐치한다면 화이트비치를 더 없이 잘 즐길 수 있을 테다.
맑고 푸른 바다 + 보랏빛 노을 + 낭만적인 라이브바.
이 세가지를 모두 갖춘 지상낙원, 보라카이 화이트비치에 대하여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