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한 사랑
이렇게 따뜻한 글이 또 있을까? 내가 아끼는 사람에게 책 한권을 선물해준다면 바로 이 책을 주고 싶다.
고수리 작가님의 '선명한 사랑'. 책의 제목처럼 우리네 사랑이 듬뿍 담겨있는 아주 따뜻한 에세이집을 읽었다. 할머니와 엄마를 향한, 아이들을 향한, 그리고 세상 구석구석을 향한 사랑이 담긴 이야기. '좋은하루 보내세요'란 인삿말에서도, 자주 찾는 단골식당에 관해서도, 그저 곁을 스쳐 걸어가는 한 사람의 장면에서도 사랑을 발견하는 작가를 보며 지극히 별 거 아닌 소재에서도 글한편 뚝딱 써내는 것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색적이거나 특별한 경험 없이 지극히 소박한 하루에서도 이런 낭만적인 글을 써내는 것에 대해 경외감이 들었다.
특히 작가가 가장 큰 사랑을 느끼는 존재, 바로 아이들에 관한 글을 읽으면 가늠할 수 없는 크기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그 감정을 어찌나 생생하고 섬세히 표현했는지, 어린 아이들을 둔 부모라면 누구든 읽고 마음이 뭉클해질 글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런 글을 선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희들과 함께한 가을은 무척 행복했단다. 행복하다, 행복해. 행복이 흘러넘쳐 소리 내어 말해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나는 행복했어.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지. 우리는 날마다 시계 말고 하늘을 올려다보았어. 해가 떠오르고 저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늘색이 다 다르다는 걸 배웠지. 천 개쯤 다른 하늘색 중에 우리가 좋아하는 단 하나의 하늘색을 고르는 법도 알게되었어.
지안이 좋아하는 하늘색은 손바닥하늘색이야. 지안은 희끄무레한 구름이 고양이털처럼 가지런히 펼쳐진 연한 하늘을 좋아해. 혼자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다가 "엄마, 손바닥같은 하늘이야"라고 조그맣게 말해줘. 그럼 우리는 서로의 손바닥을 내밀어 조글조글한 손금을 확인하지...우리가 웃는 동안에도 손바닥 같은 하늘은 우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어.
나는 그냥 너희랑 올려다보는 하늘을 가장 좋아해. 서안지안하늘색이라고 말하면 너무 싱거울까. 그런데 정말로 좋아하는 마음이란 너무나 단순하고 깨끗해서, 나는 그저 너희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좋아해.
어떤 행복은 그래. 시계를 멈추진 못하지만 시간을 멈춰버리더라. 사탕을 물고 뛰어가는 너희들 뒤를 따라 걸으며 나는, 모든 순간이 행복했고 동시에 모든 순간이 그리워졌어. 너무 행복해서 울 것 같은 마음으로 너희가 주워 온 꽃잎이나 은행잎 같은 것들을 슬그머니 주머니에 넣어왔어.
순간을 간직하는 법은 모르지만, 순간을 그리워하지 않는 법도 모르지만, 나는 아마도 오랫동안 시계를 보지 않을 것 같아. 너희와 함께 보내는 날들은 천개쯤 다르고 천개쯤 아름다워서, 꽉 껴안고 만지고 부비고 뒹굴고 간질이고 웃고 소리치면서 누리기에도 모자라니깐.
작가가 이런 몽글몽글하고 따스한 감성을 품고 있는 건, 어머니의 영향이 굉장히 큰 듯 했다. 왜냐면 작가가 자신의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말을 건네듯, 작가의 어머니 또한 작가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곤 했기 때문이다.
어느 어머니가 이렇게 서슴없이 시적인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딸아, 봄이다.
바닥에도 조그만 제비꽃 홀로 피어있길래
'여기 나 같은 꽃이 피어 있네'하고선 웃었단다.
잘 보이지 않아도, 영 보잘 것 없어도 애쓰며 꽃들 피어난단다.
참, 사는 게 꽃 같다. 다시 잘 살아보라고 봄이 오는 것 같아.
속상하고 힘든 일일랑 생각 말고 바깥에 꽃 봐라.
예쁜 꽃 봐라"
pg144.
이러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책의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고 그런 글들은 하나도 빠짐 없이 나의 눈물 버튼을 건드렸다. 지하철에서도 무표정한 상태로 책을 펼쳤다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니, 눈물 뚝뚝 흘러내기엔 너무 부끄러워 문장을 재빠르게 읽으려 했다. 그러다가도 이 문장을 금방 넘기기엔 아쉬워서 두세번씩 다시 돌아와 읽곤 했다. 그럼 어김없이 같은 구절에서 또 눈물샘이 자극을 받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어머니의 말이 생생하고 말맛 있게 참 잘 구현돼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다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순자 이모가 그러더라. 야야. 명숙아, 명숙아. 내가 창고서 뭘 발견핸지 아니? 하고선 얘기하는거야. 엄마 짐들이 여러 개라 다 어디로 분산된지 모르잖아. 우리가 힘들게 살 때 온데 없는데 짐을 막 이모들네 여기저기 맡겨두고는. 근데 순자이모네 집 창고에 뭔 상자가 있어서 열어봤대. 그랬더니 할머니 솜이불이 있더란다... 근데 할머니 솜이불을, 할머니 꺼를 다 못 버리고서. 이래봤더니 하나는 좀 멀쩡한데 다른 것들은 너무 여러 번 기워가꼬 다 헐어가지고. 그 이불을 보는데 이모가 막 눈물이 폭 쏟아지더래. 내가 있잖아. 그거를 꼬매고 덧붙이고 꼬매고 해갖고. 그거를 얼마나 꼬맸으면 다 헐어가지고. 엄마는 정말 그게 귀하잖아. 지금도 못 버리잖아. 밑에 다 깔아두고 살잖아. 할머니 이불 노랑 거 분홍 거 이런 거 쫌 촌스럽지만 버릴 수가 없잖니. 우리 엄마 꺼를 차마 못 버리겠는 그런 마음이 있는거야. 수리야, 너랑 나랑 자라면서 울 엄마가 덮어주던 거를. 엄마가 너무 보고 싶고, 엄마 냄새 남겨놓고 싶고. 눈물 폭 쏟아지는 소중함이. 아꼬와 죽겠지"
pg88.
누군가의 글을 읽으며 내 마음이 이리 포근해지다니. 나는 감탄하며 끊임없이 종이를 넘기고 넘겼다. 그리고 이 책에서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건 글의 소재와 문체뿐 아니라, 단어 하나하나의 영향도 크단 걸 알아차렸다. 평소엔 쓸 일 없는 낯선 단어들이 많이 보였는데, 뜻을 찾아보니 모두 정감 있는 단어들이었다. 에세이를 읽는 기쁨 중 하나로 이런 색다른 단어를 알게 되는 것도 있단 걸 느꼈다.
뭉근하다 : 세지 않은 불기운이 끊이지 않고 꾸준하다
달곰하다 : 감칠맛 있게 달다. 달콤하다보다 여린 느낌을 준다.
안온하다 : 조용하고 편안하다.
소담하다 : 생김새가 탐스럽다.
희붐하다 : 날이 새려고 빛이 희미하게 돌아 약간 밝은 듯 하다
또한 인상적이었던 글 한편이 있는데, '너무 무리하지 말라'는 한 마디를 해녀의 물숨에 비유하며 건네는 글이었다. 작가는 한때 "어떻게든 하겠다"는 말을 습관적으로 하며 엄청난 작업량과 부담을 감내하던 때가 있었는데 해녀인 할머니를 떠올리며 스스로 너무 몰아붙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나는 아래 글을 읽으며 '무리하지 말자!'란 당연하고 뻔한 말도 이러한 비유와 함께 전달받으면 마음에 진하게 와닿는다는 걸 느꼈다.
바다 깊은 곳에는 전복이며 소라며 크고 탐스러운 것들이 많지만 숨이 차면 밖으로 올라와야 한다. 눈 앞에 하나만 더, 더 많이 가져오려고 욕심을 부리다가는 물숨이 들어 생명이 위험해진다. 숨을 참을 수 없을 때 마지막 한번만 더 참을까, 물 밖으로 나갈까를 가르는 마지막 숨. 물숨으로 삶과 죽음이 나뉘기도 한다. 호오이 호오이. 숨을 비운다. 할머니는 딱 자신의 숨만큼만 있다가 물 위로 올라와 숨비소리를 내쉬었다...
딱 나의 숨만큼만 오늘 하루를 무사히 살아보고 싶다. 어떻게든 해낸다는 엄청난 각오 말고, 할 수 있는 만큼만 최선을 다하겠다고. 더도 덜도 말고 온전히 내가 해낼 수 있는 만큼만. 매일 저녁, 망사리에 일용할 양식을 채워 집으로 돌아오던 나의 할머니처럼.
고수리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그 매력에 흠뻑 빠진 한편, '와 나는 이렇게 쓸 자신이 없는데? 난 이렇게까지 다정할 자신이 없는데?' 란 생각이 들었다. 글이 너무 좋은 나머지 은연중에 이것이 에세이의 정석이란 생각을 갖게 돼버린 것이다.
그러다 비슷한 시기에 동시에 읽은 김혼비 작가의 글을 보면서, 역시 글에 정답은 없음을 깨달았다. 김혼비 작가의 글은 호쾌하면서도 날카롭고, 래퍼가 싸이퍼를 하는 것 마냥 비판 대상에 대해선 한없이 삐딱해지는 스타일로 고수리 작가와 결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 역시 꽤나 매력적인 감성이었으니 곧 리뷰해볼 것이다.
고수리 작가의 글은 포근한 이불 속에서 몽글몽글하게 읽기 좋은 글로, 휴식을 취할 때 읽기 딱 좋다. 잔잔한 asmr을 틀고 읽고 있으면 내가 추운 겨울 벽난로 앞에 앉아 몸을 녹이는 것 같기도, 어느 카페에 앉아 달콤한 커피한잔 마시는 여유를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몸이 추워지는 겨울엔 마음 따뜻히 뎁힐 수 있는 이 책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