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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창작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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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스무리 Nov 16. 2018

나이 먹는 사람들 (1)

인간의 나약한 정신과 이기심에 관한 창작 단편 소설

나이를 먹는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그는 머리부터 피가 빠지는 듯한 느낌을 느끼며 창백해진 얼굴을 씻어내듯 쓸어 내렸다. 정말이지 소름 돋는 사실이야, 생각하며 지금까지 보고 겪은 일을 촘촘하게 기록해 놓기로 한 채, 그는 배급되는 ‘나이’ 캡슐을 받기 위해 또다시 방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한국의 저명한 인권운동가였던 그는, 2015년 10월 27일 시리아 내전으로 고통 받는 어린이들의 실상을 알리기 위한 1인 시위를 하고자 광화문 광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아파트 8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집 앞 횡단보도를 건너는 중이었는데, 대낮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번쩍 하는 어마어마한 밝기의 불빛이 그의 시각을 마비시켰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왼쪽을 돌아보니 이미 삼각별 문양이 그의 얼굴 바로 앞에 위치해 있었고, 죽음을 직감한 그는 그 와중에도 죽기 직전의 시간은 아주 느리게 간다는 그네들의 말이 맞는 걸까 궁금해 하고 있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공기마저 익숙치 않은 낯선 방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했고, 영화에서 본 것처럼 혹시나 얼굴이나 몸이 바뀐 채 살아가는 거 아닐까 내심 기대하며 그의 시선은 마침 침대 옆에 놓여 있는 전신 거울을 향했다. 온몸을 구석구석 훑어봤지만, 바뀐 것은 없어 보였다. 여기가 천국인가? 아니면 지옥인가? 난 지금까지 착하게 살아온 것 같은데, 그럼 천국이겠지—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 밥 먹을 시간입니다! 

바깥에서 희미한 외침 소리가 들려 왔는데, 마침 천둥 치듯 요란한 소리를 내는 뱃속 알람 소리와 교묘하게 겹쳐 들린 탓인지 그 소리가 배고픔에 울부짖는 동물의 본능적인 외침 소리 같이 들렸다. 일단 배라도 채우자는 생각에 현관문을 벌컥 열자, 생각보다 아름다운, 마치 프라이부르크 근처 검은숲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편안한 녹색이 범람하고 있었다. 이미 죽었다는 ‘가정’은 까맣게 잊기라도 한 양, 그는 평소 동경해 마지 않던 푸르른 자연에 취해 절로 콧노래를 부르며 자신을 배고픔으로부터 구해줄 공간을 찾아 나섰다. 마침 군대 막사 같이 생긴 건물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자연스레 맨 뒤에 줄을 선 그에게, 앞에 있던 너그럽게 생긴 노인네가 갑작스럽게 말을 걸어 왔다.

- 여기 처음 온 거요? 못 보던 얼굴인데.
- 네, 오늘 처음 여기로 왔습니다. 죄송한데 여기는 어딘가요?

대답은 하지 않은 채, 노인은 궁금증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 남자를 홱 잡아 끌더니 줄을 이탈해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가 험악하면서도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 난 항상 모든 사람들에게 아까와 같은 질문을 합니다. 그 중 당신처럼 대답하는 사람은 몇십만 명 중 한 명 정도 될까. 여기가 어딘지 묻는다는 건 과거의 기억이 생생하다는 뜻이니까요. 그리고 그건 분명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난 믿고 있소.

과거의 기억? 보통 죽으면 생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거 아니었나? 그리고, 그럼 나를 제외한 저 줄에 서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인생을 살았었는지 인지하지 못한 채 여기에 있다는 말인가? 그는 이미 궁금한 것 투성이였지만 일단은 그 노인의 말을 더 들어보기로 했다.


-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여기는 죽은 후에 오는 곳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당신이 가장 높은 가능성으로 상상하던 사후 세계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이 대목에서 그의 호기심이 참을성을 이기고 말았다. 죽은 게 아니라뇨? 불과 몇 분 전인 것 같은데 전 분명히 길을 건너다가 큰 차에 치인 것 같은데요, 아니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는 노인의 말에 대꾸를 하면서 느끼는 자신의 감정이 살아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감과 행복감인지 아니면 새로운 세계를 체험할 수 있다는 약간의 흥분감인지 알 수 없었다. 

- 사후 세계라고 생각했다는 말인가보군. 엄밀히 말하자면 이곳은 사후 세계가 아니라네. 자네는 아직도 살아 있어. 아니, 죽었다고 해야 하나? 아마 지구에 남은, 자네가 아는 모든 사람들은 당신이 실종됐다며 울고불고 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으니. 아무튼, 단지 이제 남은 인생을 살 장소가 바뀐 것이라 생각하면 될 것 같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곳이 지옥이라는 거야. 자네 머리 속에 방금 떠오른 종교적 의미의 ‘지옥’은 아니지만, 여기에서의 삶은 정말 내게 엄청나게 큰 고통을 주고 있어.


노인이 갑자기 반말을 하며 지옥이라느니, 고통이라느니 하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자, 가뜩이나 배가 고파 신경이 예민해져 있던 그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죄송한데 일단 밥부터 먹으면 안되겠냐고 경고에 가까운 부탁을 했다. 밥? 노인은 조소 비슷한 입모양을 비치더니 자신도 한가해서 말을 붙인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 바로 그 ‘밥’이라는, 그 식량이라는 게 이곳을 지옥으로 만드는 거라네. 내가 자네에게 말을 건 이유이기도 하고. 암, 당연히 먹을 걸 먹어야 살 수 있지. 그래, 먹는 건 중요하지. 중요하고 말고. 하지만 이곳에는 밥이 없어. 자네가 집에서 먹던 쌀밥, 미역국, 때로는 치킨, 피자 등등. 아무것도 없어. 밥이라고 할 만한 식량은 ‘나이’ 캡슐인데, 아 그래, 놀랄 만 하지. 여기서는 나이를 먹는다네. 자네가 12월 31일 밤 자정 1초 전에 말하던 ‘아, 나이 한 살 더 먹었네.’와 같은 관용적 표현이 아니라, 여기서는 나이가 주식(主食)이라는 말이지. 이 알약 따위에…


노인의 말을 계속 들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그는 일단 말을 끊고 노인에게 달려들듯 질문했다.

- 그럼 저기 서 있는 많은 사람들이 다 그 나이 캡슐을 받기 위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는 말씀이신 겁니까? 그게 대체 뭔데요?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저는 서두에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는 걸 매우 싫어해서요, 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한 채 그는 노인을 다시 바라봤다. 아무래도 노인은 그가 말끝을 흐렸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는 듯이 보였다.

- 일단 좀 들어보게. 그 알약에는 말이지, 인간의 나이가 집약되어 있는 거야. 말도 안되지 않나? 눈에도 보이지 않는 나이가 캡슐로 만들어질 수가 있고 또 이걸 먹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말이네. 적어도 20년은 이 캡슐로 연명해 온 나도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그런데 더욱 믿을 수 없는 건 이 나이 캡슐이 지구에 있는 사람들의 죽음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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