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사건을 여러 번 통과하는 사람

같은 인생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일에 대하여

by 봄울


나는 요즘
‘사유한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사유가 깊다는 말은
생각이 많다는 뜻도,
어려운 말을 한다는 뜻도 아닌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은
한 가지 사건을

한 번으로 끝내지 않는 태도에
가까운 말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보통
어떤 일을 겪고 나면
그 사건에 하나의 이름을 붙인다.


좋았던 일,
나빴던 일,
억울했던 일,
잊고 싶은 일.


그리고 그 이름으로
사건을 봉인해 버린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난 뒤
그 사건을 다시 꺼내본다.


다른 감정으로,
다른 질문으로.


그때의 나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
그 사람은 어떤 자리에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만약 지금의 내가 그 장면에 서 있다면
나는 같은 반응을 했을까.


이런 질문들은
과거를 미화하기 위해서도,
상처를 합리화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저
하나의 사건을 평면으로 두지 않기 위해서다.
삶을 여러 각도로 통과했다는 말은
여러 인생을 살았다는 뜻이 아니다.
같은 인생을
다른 위치에서 다시 바라볼 줄 안다는 뜻에 가깝다.


피해자의 자리에서 한 번,
관찰자의 자리에서 한 번,
그리고 가능하다면
구조의 자리에서 한 번.


이렇게 바라보면
사건은 더 복잡해지고,
정답은 더 멀어지지만
이해의 반경은 넓어진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넓어진 반경 안에서는
사람을 쉽게 단정하기 어려워진다.


깊은 사유를 하는 사람은
결론을 서두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말보다
“이렇게도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더 오래 붙잡는다.


그 질문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삶에
다른 출입구를 하나 더 열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건 생각보다 어려운 태도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 삶의 의미를 증명하고 싶어 하고,
자기 관점을 정답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하지만
사유를 선택하는 사람은
자기 경험을
증명의 도구가 아니라
질문의 출발점으로 놓는다.


나는 요즘
이런 생각을 한다.
삶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항상 ‘옳은 시선’이 아니라
‘하나 더 볼 수 있는 여유’가 아닐까.


지금 보고 있는 각도가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유일한 중심이 아닐 수 있다는 인정.


그 여유가 있을 때
사람은 덜 단정하고,
덜 공격적이 되고,
조금 더 오래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사유는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세상을 조금 덜 오해하기 위한 태도다.


한 가지 사건을
한 번으로 끝내지 않고,
여러 번 통과해 보는 사람.


그 사람은
삶을 복잡하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꼭 같은 각도를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다른 각도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은
알고 살아가도 좋겠다.


그것만으로도
삶은 조금 덜 아프고,
조금 더 넓어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