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기록은 나를 버티게 한다
그런 날에는
무언가를 증명하려는 마음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지도
조용히 사라진다.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기록을 하는 것.
기록은
상황을 바꾸지 않는다.
당장 결과를 만들어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기록은
나를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게 한다.
포기하지도,
억지로 밀어붙이지도 않게.
나는 글을 쓰면서
나 자신을 설득하지 않는다.
대신
나의 상태를 인정한다.
오늘은 조급했다.
오늘은 창피했다.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다.
그래도 오늘은 여기에 있다.
이 문장들을 적는 동안
나는 조금씩 숨을 고른다.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나에게 먼저 알려준다.
기록은
잘 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아직 떠나지 않았다는 증거다.
예전에 나는
무언가 진행되지 않으면
글을 멈췄다.
쓸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게 생각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을
견디는 방식 역시
충분히 기록할 가치가 있다고.
꿈이 움직이지 않을 때도
사람이 흔들릴 때도
마음이 조용해질 때도
기록은 나를
원래의 자리로 데려온다.
“여기까지 잘 왔어.”
“지금은 이 속도로 가도 돼.”
“오늘은 버틴 것만으로도 충분해.”
기록은
나에게 이런 말을
대신 건네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이 기록들이
언젠가
어떤 시작의 재료가 되지 않더라도,
지금의 나를
이 자리에서 지켜주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기록은
나를 앞으로 밀어내지 않는다.
대신
나를 여기 붙잡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