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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을기억해 Apr 27. 2022

글쓰기 교사와의 만남

그즈음의 나는 다음 글을 쓰는 것에 대해 막연한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합평 시간으로 타인의 평가를 의식하기 시작한 것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기어코 글 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지적받는 것은 그런대로 피가 되고 살이 되었지만, 좋은 평가를 받는 경우에는 되려 '다음에는 무엇을 보여줘야 하나' 하는 마음을 부추겼다. 그만큼 타인의 기대는 생각보다 무거운 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경연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도 아니면서, 거기에 출연하는 이들처럼 생사를 건 오디션을 보러 온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신경이 쓰였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그렇게 다음 글을 제출하기 위해 꾸역꾸역 작성했던 글은 여느 때의 글과는 달라 보였다. 작위적으로 만들어낸 문장들이 그 자리에 왜 있어야 하는지 모르는 채 어거지로 열을 맞춰 서있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해야 할까? 나는 절망하며 그동안 썼던 여섯 개의 글을 모두 폐기하고, 글쓰기에 대한 조언을 닥치는 대로 찾았다. 그때 만난 두 가지의 글 중 하나가 바로 이슬아 작가의 글이다. 그것도 책이 아니라 신문의 칼럼으로 그를 처음 만났다. 그래서일까. 그때는 '이슬아'라는 이름보다는 '글쓰기 교사'라는 부분이 눈길을 끌었다. 자신을 글쓰기 교사라고 소개한 사람답게 칼럼은 글쓰기 지도 경험을 담담한 문체로 풀어내고 있었다.


"잘 쓰는 애도 매번 잘 쓰지는 않았다. 잘 못 쓰는 애도 매번 잘 못 쓰지는 않았다. 다들 잘 썼다 잘 못 썼다를 반복하면서 수업에 나왔다. 꾸준히 출석하는 애는 어김없이 실력이 늘었다. 계속 쓰는데 나아지지 않는 애는 없었다."


재능보다는 꾸준함을 예찬하는 그의 문장에서 위안을 얻었다. 글쓰기 교사가 이렇게 말하는 데야 다시금 써보지 않을 도리가 있나? 새로이 글을 쓸 용기가 났다. 글은 앞으로의 인생에서 결코 놓고 싶지 않은 부분이기도 하니까. 슬럼프가 올 때마다 그의 글을 두고두고 마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덧붙여 "평가를 의식하는 글쓰기는 잘 될 수 없습니다. 우선 나라는 독자가 즐거울 수 있는 글부터 써보세요"라고 말하는 다른 조언 글과 함께 나는 비로소 합평에 대한 부담을 떨칠 수 있었다. 과연 그는 내게도 글쓰기 교사였다.



이슬아 작가를 비로소 '이슬아 작가'로 인식하게 된 것은 뉴스레터에 대한 취재를 할 때였다. 회사에서 사내 기자로 활동을 하던 때, 나는 다음 달 취재 기사로 당당히 '뉴스레터'를 내밀었다. 뉴스레터는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이메일로 받아보는 소식지다. 뉴닉(newneek)으로 대표되는 뉴스레터들은 SNS처럼 가볍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가치 있다 여길만한 정보를 적당히 신속하게 제공하는 특징을 가진다. 동시에 긴 호흡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책이나 딱딱한 뉴스들보다는 좀 더 가벼운 느낌으로 자신들만의 자리를 공고히 하고 있기도 하다. 평소 구독해보고 있던 뉴스레터들은 내게 매력적인 취재거리로 다가왔고, 나는 이들에 대해 널리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취재를 이어가면서 '일간 이슬아'도 알게 됐다. 유료로 구독하는 뉴스레터의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것도 신기했고, 무엇보다 매일마다 글을 써서 이메일로 보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매일 글을 써서 보냈다고? 똑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을 때 그것이 가능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매일 글을, 그것도 사람들에게 읽힐만한 글을 써서 보낸다니. 일간 이슬아 구독 광고 전단이 가진 강렬한 인상만큼이나 이슬아라는 이름 세 글자가 내 머릿속에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취재가 끝나고 한 동안 일간 이슬아의 이슬아 작가와 칼럼 속의 글쓰기 교사가 같은 사람인지 모르고 지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트레바리에서 이슬아 작가의 책을 만나게 되면서부터다. 부지런한 사랑으로 그의 책을 처음 맞았다. 그리고 책 속에서 이슬아 작가가 맞이한 여러 선생님들도 함께 만났다.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리라. 글쓰기 교사인 그의 글을 살찌우게 만든 아이들. 아이들의 순수하고도 놀라운 글들. 그리고 거기서 다시 만난 칼럼의 글까지. 어디선가 읽은 듯한 묘한 기시감에 나는 갈무리해뒀던 글을 열어보았고, 그 칼럼을 쓴 글쓰기 교사가 이슬아 작가였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가 그였던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만난 심신단련. 이슬아 작가의 글은 잘 벼려낸 듯 날이 서있는 느낌을 주면서도 동시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유분방함이 느껴진다. 나도 그처럼 유연하게 글을 쓸 날이 올까? 책을 붙들고 있는 동안 '세계관'을 엿보는 느낌으로 그의 일상을 읽었다. 소소한 일상 같으면서도 은근히 넓은 스펙트럼의 소재를 소화해내는 모습이 감탄스러울 지경이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기도 하고, 되려 낯선 것을 끌어와 익숙한 소재로 치환해내는 그의 글솜씨는 가히 '숙련된 세탁소 사장님처럼 글을 쓴다고, 혹은 사부작사부작 장사하는 국숫집 사장님처럼 글을 쓴다고' 평가할 만하다. 남은 페이지가 줄어가는 아쉬움 속에 아껴가며 책을 읽었다. 말미에 적힌 추천사마저 인상 깊게 읽히는 책은 심신단련이 처음이었다.



개발자 지인인 A는 피아노를 친다. A는 낮에는 코드(프로그래밍)를 치고, 밤에는 코드(악보)를 친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키보드를 치는 삶으로 빗대곤 했다. 리듬을 타듯 키보드로 코딩을 하고, 다른 (피아노) 키보드로는 멜로디를 연주해낸다는 것이다. 그에겐 음악이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자리 잡고 있는 느낌이었다.


내게 프로그래밍은 글을 쓰는 것과 비슷하다고 느껴진다. 좋은 글이 짧고 명확한 문장과 쉬운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코드 또한 잘 짜여진 코드는 누구나 이해하기 쉽도록 작성된다. 뛰어난 개발자는 컴퓨터가 이해하는 코드를 넘어서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코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간결하고 우아한 코드들이 뛰어난 문장만큼이나 감탄을 자아내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동시에 코드를 짜는 일은 나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의 책을 함께 쓰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소프트웨어는 혼자 만드는 경우보다는 여러 개발자들이 함께 협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가 작성한 코드를 다른 개발자가 고치는 일은 부지기수다. 모두가 자신이 작성한 코드를 평생 책임질 수는 없기도 하거니와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말처럼 시장의 상황이 변하기도 하고, 새롭게 요구되는 기능이 생기면서 코드가 변화해야 할 필요가 생기기 때문이다. 글로 치면 살을 덧붙이거나 덜어내거나 외연을 확장하기도 하면서 더 나은 문장을 만들어가는 식이다. 이렇게 보면 서로가 서로의 독자인 동시에 공동 집필가라는 표현 딱 맞아떨어다.


그런 관점에서 나는 A와 비슷하게 글이 관통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낮에는 코드로 개발자들에게 읽힐 문장을 만들고, 밤에는 나의 생각이나 마음을 풀어내는 문장을 쓰고 싶은 것이다. 이슬아 작가가 전해준 용기와 격려의 이야기처럼 나 또한 재능보다는 꾸준함을 믿고 오늘도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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