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초고는 쓰레기라고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말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내가 비록 글밥이 아니라 코드로 밥 먹고 사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초고가 어떤 상황인지 충분히 묘사할 수 있는 정도의 자격은 있다고 셈 쳐본다. 새하얀 여백 속에 살아 숨 쉬듯 펄떡이는 단어들을 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글을 지어본 적 있는 사람일 것이다. 거칠게 잡아든 낚시꾼의 손아귀에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는 생선들처럼 당신의 손끝에서 단어들이 발버둥 치다 여백 속으로 떨어진다. 그렇게 생생한 날 것으로 이루어진 단어나 문장들은 술술 그 의미를 갖춰나갈 때도 있지만, 대체로는 그 의미를 온전히 이어가지 못하고 각자의 춤을 추고 있는 무용수들처럼 보인다. 모름지기 글이란 하나의 음악에 맞춰 군무를 추듯 절도 있고 세련되게 한 동작 한 동작이 맞물려 하나의 말을 건네듯 해야 하는데, 제각기 다른 춤을 추고 있는 모습들은 딱 오합지졸의 그것처럼 혼란스럽고 처연하다. 어떤 것은 진부하고, 어떤 것은 위엄에 가득 차 있으며, 어떤 것은 너무 경박하고, 어떤 것은 너무 시시하다. 초고란 대개 그런 것이다. 그래도 뭔가 '느낌' 같은 것을 얼추 갖추고 있는 문장이라면 그런대로 봐줄 만한 편이다. 끊기지 않고 읽히는 글, 자꾸만 다음 줄로 눈이 가고, 읽는 이에게 상상과 호기심을 일으키는 문장이라면 이미 그 안에는 글의 혼이 깃들고 있다는 증명이나 다름없다. 문장이 비로소 어떤 '글'이 되는 순간, 글의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란 바로 그런 순간을 가리키는 것일 게다.
한 편 어떤 것들은 아직 문장이라고 할 수도 없을 지경을 하고 있다. 문장이 되지 못한 단어들은 그들 자신이 생각의 파편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곳곳에 남아 여백의 빈자리를 하나둘씩 차지하고는 제멋대로 걸터앉아 있는 느낌이다. 어딘가는 한껏 여백이 느껴질 만큼 움푹 파여있고, 또 어딘가는 옹기종기 단어들이 모여 문장인 체하고 있다. 이어지는 말이 되지 못하고, 원초적인 표현들로 가득한 단어들의 집합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것이다. 크고 작은 여백들과 들쭉날쭉 늘어서 있는 단어들의 모습은 마치 전쟁터가 된 도심의 풍경을 보는 것 마냥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생명이 살지 않는 도시, 폐허가 되어버린 공간처럼 아직 쓰임을 다하지 못한 단어들이 제 위치를 찾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자리하고 있는 풍경. 초고는 그렇게 하얀 종이 위에 검은 글씨를 덧대어 만든 투박한 도시의 모습을 하고 있다.
빽빽이 채운 문단들 사이로 단어들이 그렇게 제멋대로 여기저기 한 자리씩 꿰차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젖니가 빠진 어린아이의 치아를 보는 듯도 하고, 모내기 판에 들쑥날쑥 모를 심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그들에게 짐짓 위엄 있게 읊조리는 역할은 바로 나의 것이다. 아직 생명을 부여받지 못한 씨앗과도 같은 단어들이여, 그대들을 싹 틔워줄 문장지기가 여기 왔노라. 그렇게 나는 여백 속에 무심한 듯 살아남은 단어들을 그러모아 자꾸만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을 우둔하게 이어나간다. 글을 쓴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니까. 글 속에 혼을 깃들게 하는 일이란 그런 반복 속에서 빚어지는 것일 테니까. 그러니까 '엉덩이로 글을 쓴다'는 말은 그렇게 단어들을 빚어내는 과정을 무수히 이어나가는 여정을 의미했던 것이다.
때론 그것이 녹록치 않을 때도 있다. 무작정 붙들고 있다고 해서 더 나은 글을 쓸 수 없는 때가 분명 있기는 하다. 그런 때에는 글을 발효하듯이 묵혀둘 필요가 있다. 내 글로부터 잠시 멀어지는 시간, 내가 쓴 문장들과 그것들이 가리키는 이야기로부터 스스로 낯설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거기에 얼마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딱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여기에 쓸 수 있는 말은 결국 '적당히'가 아닐까. 솜씨 좋은 간잽이들이 '적당히' 간을 치는 것처럼 내가 쓰는 글의 성격과 유형, 내가 생각하는 이야기의 방향성에 따라 발효에 필요한 시간은 각기 다르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다시 보는 글이 그토록 새로울 수가 있다는 것이다. '내 글에 이런 표현이 있었어?', '이땐 왜 이렇게 썼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이렇게 쓰면 더 좋을 것 같은데' 등등. 이렇게 보면 발효된 것은 사실 글이 아니라 나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토씨 하나 달라지지 않은 글을 두고 숙성되었다고 말할 참인가?) 어쨌든 분명한 것은 글을 쓸 준비가 마쳐지는 때는 오고야 만다는 점이다. 마감의 신이 일분일초를 다투며 재촉하든, 내가 오늘 그것을 해치우기로 결심했든, 어떤 연유에서든 간에 그날은 오게 되어있다. 스스로 그 글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이런저런 시행착오 끝에 드디어 초고가 완성된다. '초고의 완성'이란 뭘까? 내가 생각하는 '초고의 완성'은 글을 이루는 여러 문단들이 비로소 하나의 방향성을 가지고 그 의미를 이어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제 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단어도, 문장들이 가리키는 방향에서 벗어나는 생각이나 감정의 파편도 더 이상 그 안에서 찾기 힘들다. 그것들은 잘 갈무리되어 어떤 형태로든 문장 속에 편승한 지 오래다. 한 때 생선처럼 펄떡이던 단어들은 이제 장인들의 손에 잘 다듬어진 초밥처럼 제법 그럴듯하게 갖춰진 모양새를 뽐낸다.
하지만 초고가 괜히 초고겠는가. 헤밍웨이가 '쓰레기'라는 그토록 자극적인 단어를 쓴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비로소 글이 글다워지는 것은 바로 이때부터이기 때문이다. 이때를 시작으로 글의 방향성에 동의하지 못하는 문장, 의욕적으로 써놨지만 군더더기로 판명된 문장, 이 글에 함께할 수는 없지만 다른 글의 씨앗으로 제법 쓸만하다고 판단된 문단 등 글의 맥락에서 불필요한 것들은 모두 버려진다. 쏟아부은 정성을 생각하면 아까운 마음이 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과감한 결단이 필요한 것도 이 때라 할 수 있다. 때로는 그저 표현 몇 개를 고칠 뿐이지만 심할 때는 문단 몇 개가 날아가기도 하는 심판의 시간이다. 애정 하는 나무를 가지치기하는 정원사의 심정이 이러할까. 혹독하다면 혹독한 이 과정에서 살아남은 문장과 단어들만이 글로써 그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초고가 비로소 제출할 원고가 되는 데는 이러한 과정이 필수라고 봐야 한다. 이를 가리켜 '퇴고'라고 부르는데,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도 바로 퇴고다. 퇴고를 반복하는 시간만큼 글은 켜켜이 쌓여 자신만의 퇴적층을 가지고, 함부로 흉내 낼 수조차 없는 저만의 무늬를 가진 보석 같은 글이 된다. 혼이 깃든 글이란 바로 이런 것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내게 있어 퇴고는 가장 어려우면서도 흥미진진한 순간이다. 나는 그림을 끊임없이 덧칠해나가는 화가처럼 글이 매끄럽게 이어지도록 계속해서 글을 다듬고 깎아낸다. 그림에만 완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완성'이라고 마음을 다잡지 않는다면 언제든 고칠 수 있는 게 바로 글 아니던가. 수십 번의 퇴고는 순식간에 흘러간다. 각 잡고 고치려 들다 보면 두어 시간이 그 자리에서 훌쩍 지나가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심지어 글을 매만지는 일은 때때로 글을 제출한 다음에도 이루어진다. 다음날 보면 또 새로운 것이 눈에 들어오곤 하는 것이다. 나는 종종 글을 그렇게 몇 번이고 고쳐 쓰곤 했다.
완성된 글은 어느덧 빽빽하게 들어찬 도심의 풍경을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글자로 된 빌딩 숲이 한없이 줄 지어 늘어선 듯한 그 광경 속에는 시간의 흔적 또한 겹겹이 쌓여있는 느낌이다. 나는 이렇게 글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좋아한다. 그저 스쳐 지나가던 생각이 비로소 하나의 글다운 글이 되기까지의 시간. 정성을 들이는 만큼 깊이를 더해가는, 반복이 가져다주는 진한 몰입의 시간을 말이다. 열정과 애정을 가지고 글을 쓰는 경험은 스스로를 나답게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초고에서 원고가 되도록 글을 다듬는 이 반복된 여정이야말로, 우리 삶에서 한 번쯤 체험해봐야 할 값진 여정이 아닐까? 오늘도 나는 이 반복의 시간 속에서 행복한 한 때를 보냈노라고 감히 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