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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여름 Sep 11. 2024

작가라는 이름

결국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

첫 취업에 성공했던 날, 그 짜릿한 기분은 지금도 생생하다. 면접이 끝나자마자 나를 채용한 송 피디는 힘 있고 정겨운 목소리로 "서 작가!"라고 불렀다. 


스물한 살의 가을, 나는 케이블 방송사의 의학 프로그램 메인 작가로 취업했다.


작가라면 문단계에 등단하거나 대표작이 있어야 떳떳하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취업한 케이블 방송 작가는 그런 작가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나도 내 대본을 써서 돈을 버는 사람이 되었으니, 엄연히 작가가 된 것이 맞다. 그리고 스물한 살의 풋내기였던 나는 그 직업이 마음에 들었다.


문예창작과를 다녔던 내 동기들 중에는 일찍 등단해 문학 작가가 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없는 걸 보면, 등단 이후 작가로서 명성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전공을 살려 취업한 동기 중 다수는 논술 학원 강사로 취직했다. 방송 일을 하고 싶어 했던 이들은 방송 아카데미를 선택하기도 했다.


나 역시 방송 일을 하고 싶었다. 학창 시절 꿈이 기자였기도 했다. 하지만 기자는 그만한 위험과 사회적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막연한 두려움이 앞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또한, 여느 20대 초반처럼 가능한 한 화려해 보이는 직종을 선택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당시 방송 아카데미를 수료하는 비용은 200만 원 이상이었고, 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졸업한 내 형편에 아카데미를 이어 다니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아카데미를 다니는 동안에는 아르바이트도 하기 어려울 것 같았고, 그럴 명분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 시기 나는 공부가 싫었다. 공부라면 중고등학교 때 질리도록 했다고 생각했다. 진짜 진학하고 싶었던 신문방송학과나 국어국문학과는 입시 실패로 떨어졌고, 차선책으로 선택한 문예창작과에서는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만 커졌다. 특히 갓 대학에 들어온 20대 초반의 나에게 합평 시간은 서로의 작품을 합법적으로 난도질하는 시간 같았다. 날카로운 비평과 감정이 섞인 언급들이 난무했고, 때로는 자신의 작품이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리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자주 반복되는 그 격렬하고 처절한 토론 시간이 참을 수 없이 싫었다.


학창 시절 나는 논술을 꽤 잘했고, 수필에도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문학소녀는 되지 못했다. 그때의 책 읽기는 즐거움이 아닌 고통이었다. 국어 과목을 잘했지만, 문학작품을 분석하는 일이 질려 국어를 즐기지 못했다. 문예창작과에 진학하고 나서는 글쓰는 일마저 싫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과제를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싫어진 것이다. 글 잘 쓰고 말 잘하는 동기들 사이에서 내 작품을 공개할 때마다 두피에 돌기가 서고 얼굴이 뜨거웠다. 차라리 빨리 취업해서 학교를 벗어나고 싶었다. 어차피 글을 써야 한다면 돈을 내는 것보다 벌면서 쓰고 싶었다. 그러던 중 활동하던 온라인 카페에 게재된 작가 구인 글을 보게 되었고, 의지를 가득 담은 자기소개서와 면접으로 취직하게 되었다.


당시 월급은 60만 원이었다.  방송 작가는 회차당 원고료가 책정되는데, 회차당 15만 원이었다. 방송 작가의 원고료는 글 작업뿐 아니라 회의, 섭외, 인터뷰, 촬영, 편집 등 전 과정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개념이었다. 물론 그 범위는 프로그램의 규모나 제작비, 제작사, 책임자 특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나에게 주어진 일은 프로그램 출연자와 사전 인터뷰를 하고, 매주 방송 촬영 대본을 쓰고, 촬영에 함께하는 것이었다. 편집은 송 피디가 전적으로 맡았으니, 원고료 대비 시간적, 정신적 소모가 큰 일은 아니었다. 나는 매주 강남 일대 개인 병원 원장들을 만나 사전 인터뷰를 했고, 촬영 대본을 썼다. 처음 한두 회차 촬영 때는 현장에서 진행자의 검수에 따라 대본을 수정하기도 했지만, 이후에는 별다른 수정 없이 무난히 촬영을 마쳤다.


그렇게 두어 달쯤 시간이 흘러 내가 맡은 일에 순조롭게 적응해가던 중, 평소와 다른 일정으로 송 피디로부터 호출이 왔다.


"어, 이번 섭외는 서 작가가 좀 해야겠는데?"

"네? 네, 그럴게요! 피디님,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이전까지는 송 피디가 섭외해 둔 병원에 사전 인터뷰를 가는 것이 주된 일이었기 때문에, 섭외를 맡게 된 것은 신뢰를 기반으로 한 업무 확장이라는 생각에 흐뭇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결국 그 섭외 업무는 미결로 끝났다. 가장 중요한 비용 문제를 내가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케이블 방송 생태계에는 출연자가 광고비를 내고 본인의 전문 기술이나 회사를 홍보하는, 요즘 말로 하면 '뒷광고' 관행이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섭외라는 명목으로 시도한 영업 전화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케이블 방송의 수익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햇병아리 작가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기는 것을 포기한 송 피디의 결정으로, 그 일은 일단락되었다. 그로 인해 나는 그 회사에서 나의 쓸모가 한계를 맞이한 셈이었다. 그 생태계조차도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이해하게 되었으니, 어떤 부분에서는 내가 눈치가 너무 없었다.


그 프로그램을 하는 동안 나는 진행자였던 경제지 기자의 칼럼을 대필하기도 했다. 그 기자는 본인에게 들어온 칼럼을 나에게 맡겼고, 나는 A4 반 페이지 분량의 짧은 칼럼을 대필하는 대가로 건당 5만 원을 받았다. 신문사 편집장이 내 글을 좋아했다는 피드백도 여러 번 들었다. 이름 없는 작가로 기자의 글을 대필하면서 받은 5만 원은 노력 대비 적지 않은 보상이었지만, 꽤 오랫동안 모욕감으로 남았다. 20여 편의 칼럼을 쓰는 동안 약속된 날짜에 고료를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일을 하는 동안 그가 언제 고료를 줄지 매일 불안해하며 전전긍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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