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여름 Sep 18. 2024

전직

결국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

온라인 작가 카페에서 게임 시나리오 작가라는 직업을 알게 되었다. 구인란에 제시된 급여 수준은 방송계 막내 작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았고, 다양한 복지도 제공되는 정규직 포지션이었다. 당시 게임 산업은 1세대를 지나 2세대로 넘어가는 블루오션 시장이었고, 많은 회사들이 인재 채용을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방송 작가가 입봉하기 전까지 열정페이로 견뎌야 했던 것과 달리, 게임 개발은 법적 테두리 안에서 최소한의 처우가 보장된 직업이었다.


게임 시나리오 작가로 방송 작가 이력을 인정받는다면 신입 단계를 건너뛰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게임 개발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당시 게임 시나리오 작가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았고, 얕은 공부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완벽한 준비를 기다릴 수 없었기에, 게임 개발자들이 모이는 카페와 게이머들의 블로그를 드나들며 게임에 대한 이해를 높여갔다. 동시에 이력서 작성도 멈추지 않았다.


결국 기회가 찾아왔고 나는 머지않아 게임 시나리오 작가 포지션의 한 회사에 면접을 보게 되었다. 그 회사는 외산 아케이드 게임을 수입해 납품하던 곳으로, 내가 면접을 보게 된 팀은 리니지와 와우를 표방한 MMORPG를 개발하고 있었다. 개발 인원은 약 40명이었고, 당시로서는 큰 규모였다.


면접에서 설명을 듣고 나서야 내가 맡게 될 일의 실체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면접관들은 나의 이력을 매력적이라 했지만, 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최종 결정은 과제 심사를 통해 내리겠다는 의견에 나는 기꺼이 과제에 응하기로 했다.


면접관 중 한 명인 박 과장은, 합격 시 나의 사수가 될 사람으로, 일주일 내에 리니지 레벨을 10까지 올리라는 과제를 냈다. 면접을 마치고 그 길로 온라인 카페에서 알게 된 게임 친구를 만나 피시방에서 게임을 배웠다. 몇 시간 만에 게임을 설치하고 캐릭터를 만들어 10 레벨을 달성했다. 과제를 완수한 후 2차 면접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 연봉은 약 2300만 원으로 계약했고, 처음으로 4대 보험과 퇴직금이 있는 정규직 회사원이 되었다. 처음으로 4대 보험과 퇴직금이 있는 정규직 회사원이 된 것이다.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었고, 더 이상 머리맡에 핸드폰을 두고 잠들 필요가 없었다.     


교양 프로그램 구성작가에서 판타지 게임작가로 전환한 나는, MMORPG라는 장르를 이해하기 위해 톨킨 백과사전과 외국산 게임의 방대한 세계관을 분석했다. 게임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내가 쓴 세계관이 어떻게 구현되는지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주어진 시간 내에 부끄럽지 않은 세계관을 만들어내야 했다. 나는 동서양의 신화를 접목한 여덟 종족의 판타지 세계관을 작성했다. 아트 팀 동료들은 이제야 제대로 된 세계관이 나왔다며 기뻐했고, 원화가는 내 글을 배경으로 콘셉트 원화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내가 쓴 글이 캐릭터로 구현되는 경험은 첫 취업 때만큼이나 짜릿했다.


게임의 토대가 될 설계도를 만들어냈지만, 다음 단계도 만만치 않았다. 이제 게임 시나리오를 어떻게 쓸 것인가? 근본적으로 게임 시나리오란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필요했다.      


당시 게임 시나리오 작가는 국내에서 매우 드문 직업이었다. 게임 회사에 작가 팀이 있는 경우도 드물었고, 시나리오를 중요하게 여기는 회사에서나 한 명 정도 고용하는 수준이었다. 멘토도 없었고, 세계관을 시나리오화하는 프로세스나 규격도 없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했다.


게임 시나리오 작가는 보통 기획팀에 소속되지만, 시나리오작가를 채용하는 것은 프로젝트 방향성을 정하는 피디나 회사 대표였다. 그래서 독립적으로 그들과 직접 일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임 시나리오 작가는 프로젝트 책임자와 긴밀하게 소통하며 게임 세계관, 캐릭터, 배경, 아이템을 창작하고 이를 기획팀과 아트 팀에게 전달하며 협업했다. 개발 초기에는 강도 높은 업무가 요구되었지만, 그 허들을 넘으면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창작 작업이 이어졌다. 그렇게 나는 차츰 나만의 영역과 일을 정립해 갔다.




작가의 이전글 결국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