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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여름 Sep 20. 2024

사수의 영역

결국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



그런데 진짜 고민은 다른 데서 생겨났다. 면접에서부터 나의 사수로 지정된 박 과장은 온라인 카페에 판타지를 연재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게임 시나리오 멘토를 기대했다.


그런데 박 과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기획도 시나리오도 아닌 다른 영역의 사수를 시작했다. 박 과장은 배려의 선을 넘어서는 관심과 표현으로 나를 불편하게 했다. 점심 식사 중 굳이 내 해장국 소스에 고추냉이를 풀어준다던가, 불필요하게 자주 있었던 회식 자리에서는 잠시 화장실만 가도 어딜 갔냐며 전화하곤 했다. 휴일이면 카톡으로 일상사를 보내거나 몸이 아프다는 등의 안부를 알려왔다. 한편 삼십 대 후반인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며, 계속해서 소개팅을 주선을 요구했다. 소개팅이 성사되면 나에 관한 관심을 끊겠지 하는 생각에 나이대가 비슷한 사람을 소개해 주기도 했다. 그러자 집안 사정이 생겼다며 만남을 성사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나의 사적 영역에 지나친 관심을 보인다든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알린다든지, 하는 한마디로 직장 내 성희롱과 다름없는 그런 행동들로 나를 괴롭혔다. 그땐 지금처럼 직장 내 성희롱 방지 교육이 철저하지 않았고 범죄로의 인식도 부족했고 법적 장치도 부족했다.


박 과장의 정신적 괴롭힘과 더불어 기획 실장이었던 김 실장은 복도에서 마주치면 종종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처음에는 그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 불쾌함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내 어깨를 주무르며, 고생이 많아, 와 같은 말을 했다. 그 행동이 상습적으로 이어질 조짐이 보이고 나서야 문제를 인식한 나는 김 실장이 가까이 오면 자연스레 회피했다.


이런 나의 고민을 믿을 만한 동료들에게 털어놓았을 때, 그들은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그 조직에서 여러 번 반복된 일이라고 했다. 동료들은 우선 박 과장과 그 그룹에서 거리를 두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회사에 점심 도시락을 먹는 그룹이 있으니 함께 하면 어떻겠냐고 했고 나는 바로 도시락 그룹에 합류했다. 그제야 마음 편한 점심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머지않아 박 과장도 점심 도시락을 싸 오기 시작했다. 자기도 원래 도시락 그룹이었다며. 그는 적극적으로 나의 도시락 반찬을 사수하며 내 앞자리에 앉았다. 점심밥을 먹는 일이 다시 돌을 씹는 불편함으로 다가왔다.


회사 생활의 쓰린 면을 일에 대한 목표와 동료들과의 우정으로 견뎌 나갔지만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나의 동료들은 박 과장 그룹을 싫어해도 괜찮았지만 나는 싫어하는 내색을 하면 안 되는 처지였다. 나는 기획팀 소속이었고 그 말은 그들과 적대적 관계가 되면 결국 내가 가장 힘들어진다는 뜻이다. 나는 무리 지어 그들 뒤에서 흉을 보는 것으로는 다 해소할 수 없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요즘은 인사팀과 고충 부서를 통해 문제 해결을 시도해 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시기 내가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상담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기획실의 대표, 김 실장뿐이었다.


나는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털어놓고 관계 개선과 해결책을 강구하고 싶었다. 김 실장에게 면담을 신청하고 최대한 객관적이고 절제된 설명으로 내 상황을 말했다. 업무 만족도가 높으나 관계의 어려움을 느끼며 사수와의 관계를 조정하거나 조율해 주시면 좋겠다. 그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자 김 실장은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도 있으니 조금 더 구체적으로 털어놓아 보라며 내 이야기에 경청하는 태도를 보였다. 상황을 설명하다 보니 결국 사례로 이어지게 되었고 김 실장은 문제의 심각성에 공감한다며 자신이 일을 처리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그날 오후, 김 실장은 박 과장과 나를 삼자대면 시켰다. 면담 시작부터 이미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박 과장은, 내가 테이블에 앉기 무섭게 불같이 화를 냈다. 경상도 사투리 억양을 가졌던 그는 핏대를 세우며 그래, 내가 여름 씨를 좋아하기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하며 억울하다는 말을 이어갔다. 과장님의 마음은 모르겠지만 저는 그런 행동들로 인해 매우 불편하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앞으로 안 그러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박 과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내가 너를 좋아했다면, 너한테 소개팅 시켜달라고 했겠냐며 억지스러운 논리로 비아냥거렸다. 좋아하고 안 하는 감정을 떠나서 박 과장님 행동이 저를 불편하게 하고 있습니다. 나는 폭발할 듯한 감정을 억지로 누르고 침착하게 말하려 애썼다. 나의 입장을 헤아려줄 것이라 믿었던 김 실장은 오히려 박 과장의 쏟아붓는 항변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수치심과 모욕감을 참을 수 없었고 울분이 복받쳤지만, 더는 대응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퇴사 의사를 밝히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곧장 화장실로 돌진해 두 눈이 벌게지도록 꺼이꺼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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