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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여름 Sep 23. 2024

유생에서 성체로

결국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

첫 게임 회사에서의 불쾌한 경험은 그 안에서 만난 다른 동료들과 좋은 관계를 통해 상쇄되었다. 나는 비슷한 나이대에 실력 있는 이들과 네트워크를 이어갔다. 같은 회사에서 나와 성장과 성공의 길을 닦아가는 그들을 보면서 좋은 자극을 받았고 곧 새로운 곳에 취직하게 되었다. 


새 회사에서 나는 조금 더 독립적으로 전문성을 기를 수 있었다. 나를 채용한 신규 개발부 본부장 최 이사는 시나리오에 매우 열정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집요하리만큼 섬세한 검수로 시나리오 작업에 관여했고 나는 6개월간 수십 번의 수정을 거듭하며 세계관을 승인받았다. 세계관이 완성된 상태로 게임 개발을 시작하는 건 험난한 여정에 좋은 지도가 준비된 것과 같다. 신규 개발부는 섬세하게 다듬어진 세계관 지도를 기반으로 3년간의 개발 기간에 거쳐 큰 혼선 없이 게임을 완성했고 이 게임은 3년 이상 북미에서 수익을 내며 안정적인 서비스를 할 수 있었다. 


그 회사에는 조금 재미있는 역사가 있었는데, 프로그래머 출신 본부장을 비롯하여 실장, 과장급들이 연이어 사내 연애로 결혼한 것이다. 그들은 결혼 후에 같은 회사에서 일하기도, 한 사람만 회사에 남기도 했지만, 아무튼 회사에 이바지한 인력들의 사내 연애라는 선례들로 인해 회사가 사내 연애를 권장하는, 지양하지 않는, 미묘한 문화가 만들어졌다. 


20대에서 30대 초반이 주를 이루는 직원들의 연령대가 한몫하기도 했지만 사실 게임 개발 과정의 내막을 알고 보면 이해되는 일이기도 하다. 회사 밖에서 연애할 정도로 외향적인 프로그래머들이 드물거니와 그들의 일상은 야근과 주말 출근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게다가 개발자와의 연애 자체가 이 업계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어가기 쉽지 않다. 어느 누가 영화를 볼 때마다 회사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으러 뛰어나가고 데이트하다 말고 회사에 쫓아가야 하는 이상한 직업을 너그러이 볼 수 있겠는가. 


당시 일과 회사에 푹 빠져 있던 나는 야근 후에도 회사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동료들과 어울리는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다 현재의 남편과 사내 연애를 시작했다. 프로그래머인 그는 입사 후 “서버의 족쇄”로 불리던 USB와 휴대전화 고리를 받았는데 그에게 USB(게임 서버 유지 보수를 위한 접속 장치)를 주던 선배는, 이거 있으면 여자친구 안 생긴다.라고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족쇄로 인해 나는 그의 직업을 이해할 수 있었고 시시때때로 급한 수술이 있는 의사처럼 불려 가는 연인의 모습에 묘한 신뢰감도 생겼던 것 같다. 다른 동료들이 연락이 닿지 않는 시간에도 그는 불려 가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나 역시 그와 함께 주말 영화 관람 도중에 출근도 하고 술을 먹다 회사에 가기도 했다. 사내 연애하면서, 나는 더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던 것 같다. 사적인 일로 업무 분위기를 망치거나 우리의 경력에 해가 되지 않기 위해 더 충실한 마음으로 그를 만났다. 


게임 회사의 이직률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한 해 개발되는 온라인 게임 수에 비해 오픈까지 이어지는 게임이 적을뿐더러 개중 수익을 내는 게임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회사마다 성공한 하나의 게임이 앞 모를 수십 개의 프로젝트 인원의 생계를 책임지는 구조여서 타이틀이 없는 직원은, 실력 유무, 일의 강도를 떠나 만족스러운 처우를 기대할 수 없다. 설사 운이 좋아 게임이 성공해도 핵심 구성원으로 포함되지 못했다면, 고생 대비 보상받기 어렵다. 수익금 중 핵심 인력에게 주어지는 일부 보상 외에 나머지 대부분은 다음 투자를 위해 쓰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2, 3년 고된 개발 과정을 견뎌 게임을 상용화하였더라도 자신의 경력과 연봉 관리를 위해서 상급 회사나 높은 투자를 받는 A급 개발팀으로 이직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재직하고 있던 시기, 코스닥에 상장했던 그 회사는, 어느 정도 성공한 게임들의 서비스를 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인기 만화를 원작으로 소규모 개발자들을 중심으로 개발했던 게임인데, 중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큰 수익을 냈다. 다른 하나는 이전 성공 경험을 바탕으로 형식만을 바꾼 게임을 개발했는데, 기존 이용자 풀에서 유입된 마니아층을 확보하면서 회사에 또 다른 캐시카우가 되었다. 


연달아 성공을 맛본 회사의 다음 전략은, 빠른 개발과 다작을 통한 수익 창출이었다. 소위 AAA급 프로젝트를 만들어낼 고급 인력들에 투자하기보다는 기동력 좋은 신입과 주니어급 인력들을 다수 채용해서 동시에 여러 개 제품의 물량 완성에 집중하는 것. 게임의 완성도와 작품성을 추구하기보다 누구보다 빠르게 시장에 진입하고 서비스하면서 고쳐나가는 것을 전략으로 삼았다. 그러한 환경에서 인재들은 회사의 비전에 회의적이었고 장기 근속자들마저도 신입에서부터 작책자가 되기까지 회사의 연봉 테이블 안에서 재계약을 해왔기 때문에 여타 기업들의 같은 직책 급여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대우를 받았다. 


지금은 학력, 경력, 직급과 관계없이 실력과 성과 위주로 처우 협상이 가능한 회사가 많아졌지만, 당시에는 회사마다 연봉 테이블에 나름의 엄격한 기준이 있었고 조직장 권한 하에 조정이 가능한 범위 역시 한계가 있었다. 내가 아무리 성과를 내도 나의 팀장과 실장이 받는 급여 수준 이상으로 평가되는 것은 금기로 여겨졌고 나에게는 그것이 성장의 제한선이었다.


나는 근속 3년간 업무 평가를 통해 프로젝트 기여도와 성과에서 최상위권 인정받았지만 실제 인상률은 다른 직원에 비해 좋지 않았다. 협상 테이블에 앉을 때마다 파이를 들고 있던 최 이사는 “서여름 씨의 기여도와 노력, 열정은 잘 알지만, 개발 중인 상황이라 지금은 마땅한 보상을 해줄 수 없다”라는 말을 반복했고 다음 해를 기약했다.


그렇게 입사 3년 차가 되고 어김없이 협상 기간이 돌아왔다. 협상 테이블에서 최 이사는 “서여름 씨 혼자 다 했다고 생각하지 마”라며 냉소적으로 웃었다. 상용화를 앞둔 프로젝트 주기상 나의 업무적 비중이 작아진 시기였고 조직에서 지금 더 챙겨야 할 인력이 있음은 양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 이사의 냉소적 평가에 그곳에 더 있어야 할 이유를 상실했고 이직을 결심하게 되었다. 


나도 이제 업계에서 꿈의 직장이라 불리던 회사들에 도전해 볼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중에 가장 희망했던 회사에 정성 들여 지원서를 작성하고 면접 준비도 철저히 했다. 그리고 최초로 내가 원했던 회사에 관문을 통과했다. 


이직할 때, 첫 연봉 계약은 매우 중요하다. 이후 연봉 인상률에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면접에 합격했다 하더라도 끝까지 신중하게 입사 과정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다. 인성 검증 및 처우를 협의하는 최종 면접 자리, 나는 철저히 준비된 논증으로 나의 가치에 관해 설명했다. 그 결과 이전 회사 최종 연봉보다 1100만 원을 높여 이직에 성공했다. 그 결과 드디어 독립의 꿈도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직한 회사의 위치가 집에서 출퇴근하기 힘든 거리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스스로 경제적 독립이 가능한 수준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이 스물여덟, 나는 독립과 자유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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