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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여름 Sep 27. 2024

열리지 않는 천창

결국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 

이직한 회사는 특히 여성 직원들에게 근속하고 싶은 꿈의 직장으로 평가되었다. 결혼과 출산 전후 유급 휴가 기간을 업계 최고로 지원했고 강제 야근 분위기도 없었다. 직원이 실질적으로 누릴 수 있는 복지 정책들이 있었으며 아침, 점심, 저녁까지 무료 지급되는 회사 식당을 이용하면, 종일 신선하고 건강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처우와 복리후생뿐 아니라, 수준 높은 동료들에게서 배울 점이 많았다는 것이 가장 만족스러운 부분이었다. 함께 일했던 이들 가운데 몇몇은 추후 초대박 게임을 개발해 내는 성공을 이루기도 했다. 나는 그들과 키를 맞추기 위해 더 몰입해서 일했다. 내 경력에서 두 번째로 기억에 남는 칭찬을 그 시기 들었는데, 나를 채용했던 프로젝트 디렉터 장피디의 공개적인 피드백이었다. 입사 한 달 후 훌륭한 동료들에게 나를 알릴 첫 번째 프레젠테이션을 맡았다. 한 달 동안 집중력을 쏟아내어 만든 나의 문서와 발표를 들은 장피디는, 본인이 본 최고의 기획서였다고 칭찬했다. 


이듬해 나는 게임 회사에서 첫 직책을 맡게 되었다. 기획팀 리더의 갑작스러운 퇴사로 불과 스물아홉이었던 나는 6명 기획팀 리더 대행으로 발령되었다. 임시 보직이었지만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싶었고 직장에서는 물론 퇴근 후에도 일만 생각했다. 시나리오 라이터의 특수성을 넘어 팀 관리, 콘텐츠와 시스템 기획을 두루 다루는 멀티 포지션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얼마간 대행 이후 나는 정식 리더로 발령받았다. 그 팀에서 이십 대가, 더욱이 여성에게 리더를 맡기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파격적인 인사 결정이었다. 이후 나는 체력과 정신을 모두 쏟아 프로젝트에 매진했다. 오픈을 앞둔 시점 나의 에너지는 소진에 가까웠지만, 이 프로젝트를 성공리에 오픈해야 한다는 사명감엔 변함이 없었다.


한편 프로젝트 조직장이었던 장 PD는 배후에서 프로젝트를 빛낼 화려한 이력의 스타 기획자를 찾고 있었다. 스타 기획자를 통해 프로젝트를 빛내려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다. 모든 절차가 끝나고 결정이 내려진 후 나는 장피디의 호출을 받았다. 그는 나에게 기획팀에서 나와 프로젝트 매니저(PM)로 포지션을 변경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당시 게임 회사 개발팀에서 PM의 역할은, 프로젝트 리스크를 총괄하는 전문가보다는 PD의 비서였다. 그러한 결정이 비단 스타 기획자를 섭외하였기 때문만은 아닐지 모른다. 나의 업무 역량과 강점, 기여도 등 다방면을 고려한 최선의 결정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프로젝트 오픈을 앞둔 시점 나는 그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프로젝트 주기 전체에 기획자로 참여했기 때문에 그 마무리까지 내 선에서 짓고 싶었다. 나는 직책에서 내려오더라도 기획팀에 남겠다고 했다. 장 PD는 기획팀을 두 파트로 분리하고 2파트 파트장으로 나를 발령하는 것으로 최종 결정을 내렸고 나는 강등된 리더로 남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온 국민이 다 알만한 유명 게임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 새 인물이 기획팀에 합류했다. 약 3년간 리더로 뛰었던 나를 비롯해, 기획팀의 다른 재목이 아닌 새로운 사람에게 프로젝트 마무리를 맡기겠다는 디렉터의 결정에 실망과 상실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프로젝트에 대한 열정과 팀에 대한 애착이 식지 않았던 나는 새로운 리더를 도와 프로젝트를 잘 완수하기로 마음먹었고 정말 그를 돕기 위해 노력했다. 


실무 경험이 멀고 장르 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던 새로운 리더는, 끝내 갈피를 잡지 못했고 조직은 내적 외적으로 와해하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프로젝트를 오픈할 수는 있었지만, 최종 검수와 완성도 부족으로 지속적인 서비스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여러 스트레스와 체력 고갈로 면역 체제가 무너진 나는 대상포진을 진단받았고 얼마간 요양해야 했다. 이후 회사 구조조정으로 팀이 정리되었고 3년간 많은 이들의 열과 땀이 녹아든 프로젝트는 오픈 3개월 만에 시장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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