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반 스케치 수업을 결석한 적이 딱 두 번 있다. 첫 번째는 출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빠졌고, 두 번째는 살짝 권태기가 와서 일부러 가지 않았다. 두 번째 이유의 원인이 되기도 한 나의 스케치 과정을 살펴보자면,
1. 강사가 준 사진의 정중앙에 연필로 조그맣게 '+' 표시를 해 그림의 중심을 파악한다. 그 후 그림을 4개의 사분면으로 나누고 역시나 '+' 표시를 해서 구분한다. 조금 더 세밀하게 구도를 파악하고자 할 때는 각각의 사분면을 다시 4개의 사분면으로 나눠 '+'로 표시한다.
2. 스케치북에도 연필로 정중앙에 '+'를 표시해 중심이 어디인지 파악하고 앞서했던 과정을 똑같이 반복한다.
3. 사진을 보고 그림 속 사물의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해 '연필로' 스케치한다.
4. 그 후 다시 '펜으로' 그림을 그려나간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 대략 한 개의 그림을 완성하는데 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여행지에 가서 건물을 보고 바로 쓱쓱 스케치하는 자신감 있는 스케치와는 거리가 멀다.
어반 스케치를 하고 싶다고 처음 생각하게 된 계기는 오기사(오영욱)의 책 '깜삐돌리오 언덕에 앉아 그림을 그리다'를 읽고 난 후이다. 여행을 가서 카페테라스에 앉아 경치를 막힘없이 스케치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림을 그리는 데 10분 남짓 아니면, 커피를 다 마실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다. 내가 원하는 모습은 오기사처럼 펜으로 그림을 뚝딱 완성하는 것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동안 이렇게 지난한 과정을 거쳤던 이유는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첫 수업에서 스케치를 했을 때는 뭣도 모르고 바로 보이는 데로 그림을 그렸다. 그랬더니 그림이 한쪽에 치우치기도 했었고 건물의 비율이 맞지 않기도 했다. 옆의 꼼꼼한 다른 수강생이 연필로 살짝 그림의 중심을 잡는 것을 보고 나도 따라 해 봤다. 그랬더니 확실히 사물의 위치와 구도를 파악하기가 용이했고 실수가 적었다.
항상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펜으로 다시 스케치하는 것 또한 '망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펜으로 한 번 잘못 그리면 화이트로 지울 수도 없고, 스케치북 한 장을 그대로 버리고 마는 것이 아까웠다. 강사는 연필로 대략 사물의 윤곽선만 그리고 바로 펜으로 드로잉 하라고 했지만 그러기에는 불안했다. 그 결과 남들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고 그림을 그릴 때마다 스트레스가 조금씩 늘어났다.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 펜으로 바로 그리고 싶다가도 역시나 틀릴까 봐, 그림을 망칠까 봐 불안했다. 생각해 보면 그림 하나 망친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데.
완성품을 위해 사전 준비를 열심히 하는 것이 틀린 일은 아니다. 모든 일에는 준비가 탄탄해야 완성도가 높은 법이니깐. 하지만 그런 준비과정 자체가 길어지면 지치게 마련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연습생', '준비생'을 별도의 준 직업군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공시생, 아이돌 연습생 등이 하나의 신분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하나의 '직'을 얻고자 준비하는 과정을 당연하게 여기고 인정하지만, 막상 그 '직'을 얻지 못하면 준비생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 결국에 연습은 연습일 뿐 완성된 상태가 아니니깐. 그래서 사람들이 더더욱 연습과 준비에 몰입한다. 그만큼 지쳐간다.
발레리노의 사진을 보고 그린 컨투어링 드로잉(5분 소요)
스케치 수업에서 권태기에 들어가려는 찰나를 다시 끄집어내 준 것은 '컨투어링 드로잉'수업이었다. 컨투어링 드로잉은 한붓그리기처럼 종이에 펜을 떼지 않고 외곽선을 따라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다. 요즘 카페나 힙한 인테리어 사진을 보면 액자에 걸려있는 그림이 종종 컨투어링 방식으로 그린 그림들이다. 컨투어링 드로잉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드로잉 시간이 짧다는 점이다. 사물을 보고 펜으로 바로 스케치하기 때문에 10분 남짓이면 그림이 완성된다. 빨리 사물의 특징을 파악해서 선을 떼지 않고 바로 쓱쓱 그리면 끝이다.
처음 컨투어링 방식으로 그릴 때 연필로 밑그림을 그려둘까 했지만 강사는 틀려도 좋으니 바로 스케치북에 그리라고 했다. 내심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얼른 눈에 보이는 특징을 파악해서 스케치하니 그림을 그리는 속도가 확연히 빨랐다. 틀리든 말든 하나의 작품을 순식간에 뚝딱 완성하니 왠지 그동안 꿈꿨던 오기사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처음으로 밑그림 없이 그린 등대 스케치
스케치를 완성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을 늘리기보다는 그냥 되든 안 되는 작품을 완성해 보는 것.
수백 장의 사진을 찍어야 괜찮은 사진을 한 장 건지는 것처럼 그냥 바로 그리면 괜찮은 그림이 나올지도 모른다. 창의적인 아이디어 발굴을 위한 브레인스토밍의 전제조건에는 '첫째, 판단은 나중에 한다; 둘째, 양이 질을 낳는다'가 있다. 실패할까 봐 준비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받기보다는 그냥 되든 안 되든 그림을 그리니 속이 시원했다. 준비하면서 탈진하기보다는 그냥 Just Do It! 하는 저지름이 드로잉에도 필요해 보인다.